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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Jun 09. 2024

영화 <원더랜드>

기술이 인간의 마음에 닿을 때

(주의!!! 글 속에 스포일이 매우 많습니다)


예전에 곽재식 작가님과 과학동아 행사를 진행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봤다. 곽재식 작가님이 현장 질문에 답하면서 실시간으로 SF 소설을 하나 써내더라고. 특별히 해는 끼치지 않지만 마구 증식하는 식물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떨까 하더니 그 식물에 대한 사회와 사람들의 온갖 반응을 술술 풀어냈다. 당시 유행 중이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각양각색의 반응, 익히 알고 있던 언론과 대중의 양태가 ‘낯선 식물의 등장’이라는 가상의 배경 속에 익숙하고도 신선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펼쳐졌다. SF를 새롭게 마주한 순간이었다.


김초엽 작가남*의 소설 <나의 우주 영웅에 대하여>도 그랬다. 가상의 시공간에 지금의 우리 사회가 쓴웃음이 날만큼 적나라하게 담겨있었다. 그건 영화 <A, I>나 <아이, 로봇>, <Her>, <인셉션>, <엑스 마키나>, <공각기동대> 시리즈, <블레이드 러너 2049>와는 아주 다른 뭔가였다. SF에 나의 현재가 녹아있을 때에야 비로소, '재밌고 멋지구리하지만 낯선 무언가'이 아닌, 마음을 두드리는 ‘작품’이 되었다. SF에 담긴 기술 또한, ‘무섭고 불편하지만 먹고 살려면 꼭 필요한 차가운 무언가'를 넘어 ‘온도와 의미를 가진 것’이자 한결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 되었다. 조선 시대 어느 부인이 아끼던 바늘이 부러지자 헛헛한 마음에 썼다는 <조침문>만큼은 아니어도,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바꿀 때 느끼는 그 시원섭섭하고 미묘한 마음에 조금은 더 가까워졌다.   


하나의 기술,  가지 미래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그동안의 한국 SF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헐리우드식 SF를 흉내냈기 때문인지, 영화 속의 기술도, 미래의 풍경도, 낯설고 어색했다. 남의 옷을 입은 탓인지 이야기 전개나 감동도 별로 와닿지 않았다. 이럴 거면 굳이 돈 들여서 ‘과학이 발전한 미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삼을 필요가 없잖아…


솔직히 헐리우드식 SF 블록버스터가 이제는 좀 뻔한 감이 있다. 이 영화들의 배경은 종종, 뭐가 뭔지 안 보여서 짜증이 날만큼 어둠침침하다. 그리고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빈부격차의 한 켠에는 최첨단 기술이, 반대 켠에는 거칠고 무식하고 가난한 자들이 음식같지도 않은 것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블레이드 러너 2019>, <블레이드 러너 2049>, <A.I.>,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그랬다. 이 가난한 자들은 초라하고 나약한 배경일 뿐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서부영화에서 주인공이 멋들어지게 총질을 하는 동안 마을 주민들은 총맞아 죽을 때 외엔 보이지도 않는 것과 비슷하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운동,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이 익숙한 우리에겐 굉장히 어색한 풍경이다.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 제국주의 열강처럼 인간을 지배하려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터미네이터>, <아이, 로봇>, <매트릭스>, <엑스 마키나>가 그랬다. 그들의 SF 영화에는 그들의 역사와 세계관이 담겨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건 좀 이상한 포인트인데, ‘여튼간에 주방이나 요리와는 거리가 굉장히 먼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느낌이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인터스텔라>, <Her>의 다른 부분은 다 멋지구리한데 주방만큼은 1990년대에 나온 시트콤 <프렌즈>랑 너무 비슷하더라고... 1990년대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 <인터스텔라>, <Her>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동안 주방만은 그대로라는 게 말이 되는 설정일까? 과연 얘네가 그린 미래가, 미래 사회에 대한 유일하게 합리적인 그림이자 전부일까?


바로 이점 때문에 한국의 SF 영화를 기다렸다. 늘상 보던 거는 이제 좀 따분하고, 뭔가 재밌고 신선하면서도 다른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내내 SF 영화를 만들어온 문화와는 다른 문화의 사람이 색다른 걸 만들 확률이 더 높고, 기왕이면 우리나라에서 하나 내줬으면 했지. 그런데 그게 참 잘 안보이더라고. 우리나라 영화 수준을 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은데도 왜 못하는지 궁금했는데, 이번에 <원더랜드>를 보면서 느꼈다. 그동안은 ‘자신감이 부족했구나!’하고. (1) 어려운(?!) 과학기술을 작품에 녹여낼만큼 과학기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2) SF라는 장르를 완전히 한국식으로 장악해도 괜찮다는 자신감도, (3) 우리 기술로 우리 나라를 넘어 해외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그동안은 부족했던 것 같다. 이 어려움을 <원더랜드>는 극복했고, 덕분에 국산 대중 SF영화의 변곡점을 찍은 것으로 보였다.  


자신감의 몇가지 표현들 

영화가 시작될 때 조금 놀랐다. 첫 대사가 한국어가 아닌 영어였기 때문이다. 조금 뒤에는 더 놀랐다. 중국어까지 나오더라고. 심지어 배우들의 발음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제 한국에서 배우하려면 중국어, 영어까지 잘해야 하는구나’ 하는 측은함과 함께, 달라진 한국 영화의 위상을 실감했다. (탕웨이가 출연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상 시청자의 범위를 고려한 의도적인 안배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회사의 서비스가 영어로 해외에 소개됐고, 중국 가정에서 이 서비스를 쓴다는 설정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기술력과 한국 기업의 위상에 대한 국민들의 자신감이 부족했던 2000년대, 한류 확산과 코로나 대처 등으로 눈 떠보니 선진국이던 시기를 경험하지 못한 2010년대만 해도 이런 설정은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감 없는 국뽕이라고 인터넷에서 욕이나 먹었겠지. 당연히 외국계 회사로 설정해야 했을 거고... 하지만 이제는 저런 서비스의 범위를 한국으로 제한하는 게 오히려 어색하고, 한국 기업이 충분히 할 법하게 느껴진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도 괴물이 나타났는데 국내외 과학기술계 및 해외 정치계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정이 어색했다. 의도는 이해되지만 여기가 북한은 아니잖아?)


동시에 중국의 경제력 향상을 실감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가정에서 한국의 최첨단 서비스를 구독한다는 설정이 조금은 어색했을 것 같은데 <원더랜드>에서는 그냥 당연하게 느껴졌거든. 혐한이니 혐중이니 하면서도 경제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얽힌 한중 관계도 실감됐다. 영화에 중국 가정과 중국 배우를 삽입하면 보다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 내 시청자도 늘릴 거라고 염두에 두고 만든 걸로 보였다.


작품에 영어가 나오는데, 외국 가족으로 미국 가정이 아닌 중국 가정을 삽입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내가 생상해봐도 <원더랜드>에 미국 가정이 나오는 건 뜬금없고 어색하겠더라고. 한국 서비스가 미국에 유통되는 것에 대한 자신감 부족도 없지는 않지만 (국뽕이라며 열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조금은 나올 거 같다), 그보다는 문화적 차이가 문제가 됐다. <원더랜드> 전반의 미묘한 정서랄까 그런 게 같은 문화권인 중국에 적용했을 때는 어색하지 않지만, 미국 가정에 적용하려면 아예 장르를 바꿔야 할 것 같은 느낌?**

 

익숙해져버린(?) 첨단(?) 과학기술

영화에 나온 모든 기술이 그냥저냥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핸드폰을 TV에 연결해서 화상통화를 하는 장면이나, 패드 등은 이미 상용화된 기술이고, 벽유리(?)에 화면을 띄우는 것도 현실에서 본적은 없지만 매체에 하도 자주 나와서 어제 겪은 일인양 당연하게 느껴졌다. 우주선 장면도, 영화랑 김소연 박사 영상에서 몇 번 본 덕분인지, 현실감있고 영상미 넘치게 잘 찍었네, 뭐 이런 정도의 편안한 기분으로 봤다.


가장 핵심이 되는 마음을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기술도, 소설, 드라마, 영화에서 이미 여러 번 본 덕분인지 익숙했다. VR 기술도 속속 발전하고 있고, 얼마전엔 Claude같은 LLM의 마음(단어 간의 연관관계)을 측정하고 바꾸는 방법에 대한 논문까지 나왔기에, ‘대화만 가능한 버전으로는 몇 년 안에 가능할래나?’ 싶기까지 했다 (표상들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이고 상충하지 않는 사건 기억들을 집어넣어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는 과정, 그러면서도 그 외의 기억은 해치지 않는 작업이 과연 가능할지, 상상이 안되기는 한다).


서비스 속의 객체(?)인 바이리(탕웨이)가 외부 네트워크를 해킹해서 단체 전화를 돌리는 부분이 궁금하긴 했는데, 그것도 공각기동대 1편 끝부분으로 면역(?)이 된 덕분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탕웨이가 서비스 코어로 접근할 때 모래 폭풍이 치는 장면도, <트루먼 쇼>의 마지막 부분 덕분에 면역(?)이 되기도 했고, ‘영화로 저걸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나’ 싶어 편안하게 넘어갔다.


요컨대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 너무 말이 안되서 고통스러운 부분이 없어서 신기하기까지 했다. 감독이 연출을 잘 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아직 오지 않은 기술이  ‘타인의 상상’을 통해 익숙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지금껏 기술 변혁을 주도해온 서구 주요국들이 그랬겠지. 자기 나라에서 만든 기술과 자기네 기업, 자기네 사회를 배경으로, 자기네 문제의식을 담아, 자신들에게는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SF 영화들을, 한편도 아니고 여러편 반복해서 누리며, 기술이 가져올 사회 변화에 한 발 먼저 대응할 수 있었겠지. 심리적으로든, 제도적으로든. 한국이 R&D 투자에 비해 연구 성과의 사회경제적 확산이 더디다고들 하는데 (Korean paradox), 그 이유가 양질의 국산 SF 및 그런 SF를 제작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의 부재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적인” SF 영화 

SF 영화임에도 늘 보던 한국 드라마를 보듯 편안하고 익숙했다. 한국 드라마들처럼 (물론 드라마보다는 더) 영상이 굉장히 아름다웠고 (탕웨이의 춤을 거울들을 통해 비춰준 장면, 우주선을 타고 있는 태주(박보검) 옆에 정인(수지)가 나타나는 장면 등), 수지가 유리벽에 머리를 박는 장면 등 수지와 박보검이 함께 있는 장면은 달달했다. 워낙 연기들을 잘하시고 화면까지 이쁘니, 남자 배우들의 살짝 맹하지만 섬세하고 귀여운 부분도 잘 나왔다. 이러니 Krama가 외국 여성들한테까지 잘 팔릴 수밖에 없지. (남자는 멋있어 보일 때가 아니라 귀여워 보일 때 게임 끝인 거 같다. 팬들이 왜 '멋있어어' 대신에 ‘궈여워어’ 하면서 돌고래 비명을 지르겠냐고… 한국 드라마 작가와 제작자들은 남자가 어떨 때 귀여워보이는지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영화 <Crash>가 인종차별의 다양한 모습을 그저 보여준 것처럼, 하나의 기술이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치며 일어나는 갖가지 모습을 판단없이 비춰준 점도 마음에 들었다. 영웅도 악당도 없이, 모든 인물이 다른 그대로 대등하게 어울려 있고, 심오하고 거대한 하나의 결론을 향해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사실이 그렇잖은가. (도구를 매뉴얼에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쓰는 게 한국인 종특이라고는 하더라마는 그래도) 세상에 온갖 사람이 다 있는데, 그 사람들과 부딪히는 기술도 당연히 천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겠지. 심각하고 멋지구리한 질문 안 다뤄도, 다양한 양태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고, 긴장감있고, 의미가 있었다. 언젠가 우리의 문화적 토양이나 사회적 필요에 따라 다가올 기술에 대한 거국적이고 심오한 질문이 생기면, 그건 그 때 가서 다루면 된다. 근데 아직은 우리 그런거 없잖아. 기다리면, 그것도 생기겠지****. 우리가 어려운 주제라고 해서 영화로 못 다루는 것도 아니고 여건만 되면 가지고 노는데, 배짱 두둑하게 깔고 기다려 보자고.


한국 영화와 드라마 속의 과학기술자가 자연스러워 보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구체적으로 나열하진 않겠지만, 솔직히 그동안 진짜 오글거리고 고통스러웠다. 현실에 저런 과학기술자가 어딨냐고. 아니, 사람들한테 과학기술자 이미지란 이런거야? 진짜? ㅠㅠㅠ 적어도 나의 제한적인 경험에서는, 정유미, 최우식 님의 연기가 가장 리얼했다. 물론, 기존 한국 작품들에 나온 과학기술자처럼 연기했다가는 영화 전체의 리듬을 다 부숴먹기도 했을 거다.


영화에 소개된 과학기술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에 신선하게 만들기가 더 어려웠을텐데, 뻔한 영화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장르인지를 완전히 파악하고, 우리 스타일로 ‘ 씹어먹은’ 다음에, ‘자, 이제 이건 내 꺼야’ 하고 멋지구리하게 테이블에다 탁 던지는, 뭐 그런 느낌? ‘와 대박! 인생영화야!’하면서 기립박수 칠 정도는 아니지만, 나의 기준으로는 한국 대중 SF 영화에서 변곡점이라고 할만 했다. 훌륭한 영화 제작 능력만으로는 헐리우드 같은 SF를 만들기 어렵고, 그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과,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자신감까지 모두 갖춰야 만들 수 있음을 깨달은 것도 의미가 있었다.


이 정도 수준으로 한번 해봤으니까 갈수록 더 잘하겠지. 궁금하다.



각주 ===================

* 나도 믿는다. 노래를 듣는 사람에 비해 책을 읽는 사람이 현저하게 적어서일 뿐, 김초엽은 BTS급으로 K-culture를 대표하는 사람이 될 거고, 그렇게 되는 게 세계 평화에도 유익할 거라고. BTS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위기를 지날 때 적지않은 위로가 되었듯, 과학과 기술이라는 자칫 차갑고도 두려운 대상을 따뜻하게, 새롭게, 인간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김초엽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신경윤리학의 주요 주제 중에 cognitive enhancement라는 게 있다. 나름 고심했던 문제였는데 여기에 대한 답을 김초엽의 소설에서 찾았다. 논문을 읽고 이해하면 머리에서 가슴으로 보내는 작업을 추가로 거쳐야 하지만, 그의 소설을 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

심지어 김초엽 소설의 감성은 Krama에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치는 여러 측면들과 겹친다. 영화 <원더랜드>의 감성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는 사람보다 영상을 보는 사람이 많은 시대인만큼, 김초엽의 소설이 영화와 드라마로 많이, 많이, 많이! 만들어져서 꼭!! 여러 사람이 보면 좋겠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한-중은 친해질 수만 있으면 친해지면 좋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나라끼리 편갈라 싸우면 2차 냉전 밖에 더 하나? 주요국 중에 거의 유일하게 땅따먹기 안 했던 나라이자, 냉전 최대의 피해자인 우리라도 딱 중심 잡고, 그 김에 챙길 것도 야무지게 챙겨야지.


*** 당연한 이야기지만 SF 영화가 Korean paradox의 유일한 이유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더 중요한 이유는 국가 규모와 연구 평가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https://www.facebook.com/minryung.song/posts/pfbid098PoqAMHaMsmep4oMyVUvtUBN84XnPzKTqF6V22NRoACd8w6w4hnaxvEaquujcLPl


**** 거국적, 까지는 아닐지라도 기술과 만나는 사회에 대한 인간적 고민들로 뭐가 있을지 궁금하다면 KAIST 전치형 교수님의 한겨레 칼럼들을 추천한다. 인공지능 등 미래기술 관련해서 해외에서 이미 너무 여러번 재탕된 질문말고, 지금 여기, 한국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는 질문과 고민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외:
<원더랜드>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와 고객이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만일 저 서비스를 구글이나 메타 같은 해외의 거대 플랫폼 기업이 제공한다면 어떻게 우리 의견을 전하고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정부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지난 수백년 간 실험도 많이 됐고, 만족스럽진 못할망정 제도도 제법 갖춰져 있다. 하지만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 '한컴' 등 자체 기업을 육성함으로써 대응해 온 것 같은데, 한글 프로그램에 대한 원성을 봐도 그렇고, 이 방법'만' 쓰기에는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슬프게도) 이런 기업을 못 가진 나라들 (유럽, 일본, 호주, 캐나다 등)과 함께 고민하고 실험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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