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저는 키가 작아서 바지를 사면 늘 수선해서 입어요. 키가 작은 게 콤플렉스이다 보니 수선할 때마다 민감한데요. 이를 테면 cm단위도 아닌 mm단위로 측정해서 세탁소 사장님께 부탁드리죠. 10년 넘게 다니던 세탁소 사장님과는 이제 '척하면 척'이 된 사이라, 사장님이 꼼꼼하게 수선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세탁소가 어느 날부터 주말에는 영업을 하지 않아 직장인인 저로서는 도저히 세탁소 영업시간에 맞출 수가 없게 되었어요. 아쉽지만 다른 세탁소를 찾아봐야 했는데요. 퇴근 후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문득 한 상가 2층에 창문이 열린 세탁소가 눈에 띄었습니다. 간판 색이 바래서 세탁소가 맞는지도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혹시나 싶어 2층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2층에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이미 엄청 큰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소리를 안내 삼아 긴 복도를 따라 걸으니 세월의 흔적이 묻은 세탁소가 있었고, 열린 문틈 사이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는 고령의 할아버지 사장님이 보였습니다. 제가 인사를 드리자 사장님은 반가운 얼굴로 저를 맞이해 주셨는데요.
"바지 길이 수선하는 건 얼마예요?"
"예?"
"(더 큰 목소리로) 바지 길이 수선하는 건 얼마예요?!"
"5천 원이요."
"혹시 몇 시까지 영업하세요?"
"아무 때나 오세요."
"아.. 오늘은 너무 늦었고 바지도 안 가져와서, 내일 다시 올게요!"
세탁소에서 나와 돌아서서 다시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저를 뒤따라 나온 사장님이 명함을 가져가라고 외치셨어요. 오랜만에 찾아온 새 손님이 반가우신 것 같기도 하고, 꼭 제가 다시 찾아오길 바라시는 것 같았죠. 죄송스럽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 세탁소에 바지를 맡겨도 될까 싶었어요. 원래 맡기던 세탁소가 아니다 보니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고 크게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상하게 마음이 걸렸고, 늦은 시간이지만 저는 결국 바지를 들고 다시 그 세탁소로 향했습니다.
사장님은 금방 수선을 해줄 테니 잠깐 앉아서 기다리리라고 하셨지만, 저는 앉지 못했습니다. 미싱을 하는 내내 실을 풀었다 넣었다 반복하시는 사장님을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했거든요. '알고 보니 재야의 고수였다!' 같은 해피엔딩이면 좋으련만, 결과를 말씀드리면 박음질의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밤 9시가 넘은 시간, 선뜻 바지 한 벌을 수선해 주겠다고 하는 세탁소가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싶었죠. 해맑은 미소로 "Very good!"을 외치며 수선을 마친 바지를 건네주시는 사장님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탁소에 걸어두신 위생교육수료증을 보니 1943년생, 그러니까 82세의 나이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이 그저 존경스러웠습니다.
'손님이 왕'은 옛말이라지만, 이제는 손님을 푸대접하는 곳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방문한 여주 프리미엄 아웃렛의 한 브랜드 매장은 매장 안이 텅텅 비어있는데도 불구하고, 35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손님들을 가게 밖에서 길게 줄을 서게 만들더군요. 그들에겐 마케팅 수단일지 모르겠지만, 과연 이게 손님을 손님으로 대하는 태도인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볼까 싶어 1시에 상담을 예약하고 바리스타 학원에 찾아갔는데요. 상담사가 저와 눈 한 번을 맞추고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는 말도 없이 다른 분들과 상담을 이어갔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찾아온 제가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저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싶어 그냥 학원을 나섰습니다.
바지 수선 결과는 아쉽지만, 82세 할아버지 사장님의 세탁소에서 오랜만에 손님다운 손님 대접을 받았습니다. 비록 '수선' 전문가는 아니셨을지 몰라도, 어쩌면 그게 82세 할아버지 사장님께서 롱런을 하신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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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