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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ul 01. 2016

샹그릴라는 없었다(1): 산등성이 오지 마을을 찾아서

카무족 소수민족 마을을 찾아서...(1편)

그곳을 다녀오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추억이라기 보단 기억이다. 3일 간 아이 쏨분과 함께 했던 라오스 최고의 오지마을에 대한 방문 기록이다. 추억이란 스펙트럼으로 보는 태양과 같다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기억도 추억으로 남았다. 어떤 여행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라오스 북부는 산악지역이다. 평지에 사는 라오룸들과는 달리 라오숭과 라오퉁 족들은 아직도 대부분 산악지역에서 살고 있다. 라오들의 땅에는 공식적으로는 50여 개의 부족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비공식적으로는 200여 부족으로 나누기도 한다. 21세기에도 라오스는 여전히 부족 국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도시가 생겨나면서 60% 정도의 사람들은 평지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지에는 이 소수민족들이 가난하게 살아간다. 어찌 보면 산에서 사는 사람들의 라오스인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2000년 초까지도 총을 든 산적들이 나타나기도 했고, 베트남 국경지역에는 여전히 터지지 않는 불발탄(UXO)들이 남아있어 접근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인지 라오스의 오지 마을과 이들의 삶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루앙프라방 오지의 산 속에 있는 카무족 마을


라오스에 온 지 5개월이 지났을 때쯤 산지에 살고 있는 라오 인들을 보고 싶었다. 밀림 속에서 발견된 '앙코르와트'처럼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를 샹그릴라를 발견하길 꿈꿨다. 아직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어느 산골에서 고대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들의 비밀 집단이 살지는 않을까. 그 옛날 공동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부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가들처럼 신기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했던 아이 쏨분에게 나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마을에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자신이 얼마나 오지에서 왔는지를 이야기하며 그곳이 내가 찾는 곳이라 힘주어 말했다. 일사천리로 방문 일정이 잡혔다.


화물용 버스에 탄 승객들


버스는 한 시간째 멈춰서 있다. 오후 5시에 출발한 야간 버스는 정류장을 나온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길가에 멈춰 섰다. 짐을 싣기 위해서였다. 버스의 뒷자리는 이미 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버스인지 화물용 트럭인지 구분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또다시 짐을 싣기 시작했다. 정류장 밖, 정해진 위치에 멈춰 서자 남자 차장 2명이 주변에 정차한 트럭에서 짐을 내려 버스 지붕 위 선반에 싣기 시작했다. 그 일을 한 시간째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길 언제 출발하지...


아직도 여전히 더운 날씨에 한 시간째 꼼짝 못 하고 앉아 있자니,  이런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가끔 버스 지붕에 짐을 가득 올려서 가는 버스를 보면 그저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짐들이 어떻게 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버스는 승객보다는 짐을 실어 나르면서 수익을 올리는 듯했다. 이렇게 과적을 하고도 과연 안전하게 갈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버스 승객 중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라오스에 살면서 아직 이들이 불평하는 경우를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한 면일뿐이다. 그들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버스 안은 더웠다.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 멀미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인내가 한계에 달해 거의 폭발할 때쯤 버스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난 이미 지쳤다. 날씨는 여전히 푹푹 쪘다. 벌써 주위는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방비엥을 지날쯤 하늘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길가는 칠흑 같은 어둠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끔 보이는 인가에서 나오는 붉은 백열등이 이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걸 알게 했다. 방비엥 인근에서 휴게소, 그저 허름한 가게, 에 들렀다. 간단히 국수로 요기하고 70년대 화장실에서 급한 볼일을 해결했다. 


이런, 여기서 또다시 짐을 싣는다. 버스 뒷자리가 가득 차도록 또 짐을 싣는다. 버스 뒷자리에 가득 찬 짐을 다시 구겨 넣은 후 또다시 짐을 실었다. 짐 대부분은 동네 철물점에서나 판매할 상품들이었다. 밤 9시 무렵임에도 아직 방비엥을 지나지도 못했다. 떠날 때의 호기로움과는 달리 몸은 벌써 지쳐가고 있었다.


이쁜 차장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


짐을 모두 구겨 넣은 버스는 다시 길을 떠났다. 하염없이 먼길을 떠났다. 운전사 옆에는 조수와 여자 차장이 피곤한 듯 앉아 있었다. 여자 차장은 늘씬하고 이쁘장하게 생겼다. 허름한 청바지가 아니라 잘 차려 입고 강남 거리에 나타났다면 뭇 남자들의 고개가 한 번쯤은 돌아가지 않았을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는 큰소리를 많이 쳐서 인지 목소리는 약간 쇳소리가 나고, 얼굴은 검게 그을렸다.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듯 샌들을 신은 발은 거칠었다. 이쁘장한 선머슴아 같은 느낌이랄까, 라오스의 순진한 처자들과는 달리 직업 전선에 뛰어든 차장은 남자 차장에게도 곧잘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이 역시 라오스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떠난 지 6-7 시간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모두 잠에 곯아떨어졌다. 화물과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의 공기는 갑갑했다. 두통과 메스꺼움이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나마 늦은 밤의 한기가 겨우 그 메스꺼움을 억누르고 있었다. 덥지는 않지만 답답했고 춥지는 않았지만 으슬했다. 차 안의 탁한 공기는 비좁은 자리와 함께 여행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다.


루앙프라방 가는 길에 산사태로 길이 막혀 있다. 짐을 가득 실은 버스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멈춰 선 버스는 밤새 멈춰서있다.


버스는 점점 더 깊은 산 위로 올라갔다. 한참을 지나도 인가의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이제 점점 더 문명과 동떨어진 세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가끔씩 치는 번개에 비친 풍경에서 아직도 산악지역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멈추었다. 잠시 다른 차를 피하나 싶었지만, 한참을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에 탄 사람들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인지 라오스 다운 반응이었다.


한두 시간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차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우리도 곧 사태를 알아차렸다. 방금 전 내린 소나기로 길에 산사태가 난 모양이었다. 곧 움직일 것 같던 버스는 그렇게 날이 밝아올 때까지 그러고 서 있었다.


멈춰버린 차 안의 공기는 더 갑갑하게 느껴졌고, 새벽의 한기는 기세를 떨쳤다. 라오스 여행은 원래가 이렇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금요일 밤차를 이용해서 주말여행을 하는 여행자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체였다. 새벽이 밝아 오자 드디어 산사태가 난 곳을 볼 수 있었다. 밖에서는 이미 운전자들이 무너진 곳을 찾아 땅을 고르고 있었다. 길에 쏟아진 진흙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사람들이 함께 버스를 밀었다. 그렇게 갇혔던 버스가 빠져나가자, 길가에 늘어섰던 긴 버스의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춰 선 지 여섯 시간 만에 버스는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루앙프라방에서 우돔사이 경계에 있는 남박(NAMBAK)군 소재지


루앙프라방을 거쳐 우돔사이로 버스는 계속 달렸다. 원래는 새벽에 도착하기로 한 곳을 아침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린 곳은 우리나라 70년대나 봤을 법한 시골의 허술한 버스정류장이었다. 라오스 여느 시골 마을처럼 황량했다. 길거리에는 중국 윈난성 번호판을 단 트럭들이 가끔 지나다니는 것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태워갈 오토바이 두 대가 달려왔다. 쏨분의 친척들이다.


나를 태우고 가는 오토바이, 운전자는 소수민족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이다


먼 길을 다시 떠나기 전에 우리 일행은 버스정류장 옆 식당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했다. 까오냐오(참쌀밥)와 삶은 닭고기, 조금 말린 민물생선, 삶은 채소와 죽순, 그리고 계속 재순환되는 양념 그릇. 이 사람들 기준으로 식사는 훌륭했지만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죽순과 삶은 채소뿐이었다. 여기 토종닭들은 먹을 수 있는 살점이 거의 없다. 굵은 뼈에 단단히 붙은 약간의 껍질과 아주 조금의 순살을 쏨분과 그의 친구들은 열심히 핥는다. 주책 맞게도 이럴 때 이 친구가 절에서 스님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라오스 사람들은 외국 사람이 밥을 살 때면 항상 좀 과하게 주문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닭고기와 일부 반찬이 조금 남았다. 쏨분의 친구가 남은 음식을 비닐에 포장해서 오토바이 바구니에 달아 메었다. 아마도 애들에게 가져다 줄 모양이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밖에서 찬거리를 조금 가져왔을 때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버지가 먼길을 떠났을 때 기다렸다면 그건 그 새로운 음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4시간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는 게 보기처럼 쉽지는 않았다. 운전자에서 풍겨오는 땀 냄새는 금세 적응되었지만 뒷자리에 앉아서 균형을 잡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창피스럽세 남자의 허리를 잡을 수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뒷자리에 겨우 붙어 있었다.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라오스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엄마에게 매달려 오토바이를 타기 때문에 여럿이 타고 있어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난 그렇지 못했다. 뒷부분 손잡이를 강하게 잡고 있어서 어깨가 결려왔다. 한두 시간을 비포장 길을 달려가자 척추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작로는 농로처럼 좁아졌다. 자갈길도 보이지 않고 흙길이 눈에 들어왔다. 한두 시간이 지나자 어깨와 다리 근육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이 친구들 좀 쉬어가지. 이러다 마을에 다다르기도 전에 오토바이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나의 모습이 우습게 보이진 않을까.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한계가 다다를 때쯤, 드디어 쉬어 가는 마을이 나왔다. 우리를 태워주러 온 이 친구들이 사는 동네이다.   


우리를 태워준 오토바이 주인, 선생님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들어서자 이들의 지난 한 삶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집들은 나무 기둥과 대나무로 엮어 만든 벽이 전부였다. 부엌 세간살이라고는 불 피우는 자리와 검게 그을린 솥이 다였다. 조그만 집에 딸린 헛간 같은 방은 창이 없어서 어두웠다. 없는 세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스피커가 방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주인장은 손님을 방으로 불러 놀고 차를 내기도 전에 스피커부터 먼저 틀려고 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열정적인 밤을 밝혔을 만한, 노래방에나 있을 정도의 앰프 일체형 스피커였다. 그리고 안주인은 손님에게 낼 차라도 끓이기 위해 나뭇가지를 모으고 불을 지펴 물을 끓인다.


나는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사양했다. 아마도 핏기가 없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안주인이 내어오는 차를 마실만한 용기가 내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을 들어설 때 마다 온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려든다.


이방인,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다.


아마도 이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에서 온 외지인을 맞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 모양이었다. 온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내가 이 사람들과 다르게라도 생겼나? 난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여기서 따진들 무엇하랴! 쏨분은 가지고 온 과자 박스 하나를 이 동네에 풀었다. 동생이 비엔티안 시내에 있는 절간에서 탁발하며 모은 과자들 이었다. 쏨분의 동생은 2년 만에 고향을 찾아가는 형에게 모아두었던 과자를 부쳤다. 고향에서 과자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아이들을 위해 틈틈이 모았을 동생의 따뜻한 마음씨가 떠올랐다. 그는 과자를 모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릴 적 살았던 고향의 산, 배고픈 동생들, 그리고 부모님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쏨분이 그랬듯이 그의 동생도 절간에 어린 스님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온 다양한 과자와 선물 보따리도 풀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k-mart에서 구입한 한국의 과자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것일 게다. 그 맛이 어떨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과자는 어떤 과자이던, 그 느낌이 어땠는지 나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집 대문 밖에는 동네 애들이 다 모여들었다. 아니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 모여들었다.


카무족이 주로 사는 마을의 초등학교, 산속에서 온 학생들은 헛간 같은 기숙사(우하)에서 생활한다.


이미 일정이 많이 늦었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은 학교를 기어이 보고 가자고 한다. 성의를 가지고 학생들의 수와 학교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고는 산 밑의 한 공터를 가리켰다. 학생들과 같이 산을 깎아 평탄 작업을 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외부의 지원이 있으며 새롭게 학교를 지을 장소라고. 내가 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로 보였을까. 내가 그럴 수 있을 만큼 부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고사리 손들이 새로운 학교 건물을 꿈꾸며 더운 땡볕에서 일을 했을 것이다. 이런 광경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울컥함이 몰려오는 것 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이곳도 문명과 동떨어진 오지지만, 이곳보다 더 먼 산 위에서 온 초등학생들이 사는 기숙사를 차마 둘러보지는 못했다. 수도도, 난방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취사를 해결할지 눈에 선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들을 떠나 이곳에서 공부한다. 스스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이런 열악한 곳에서도 꿈이 자랄 수 있을까.


우리는 다시 오토바이 두대에 나눠 타고 지금 온 것보다 더 먼 곳으로 다시 떠났다. 이미 해는 속절없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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