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해가 졌고, 그때는 몰랐지만 그녀는 퇴근할 시간이었다. 오후에 만난 아이 때문에 그녀 본연의 일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씩씩하게 그를 차에 태우고 그의 집으로 갔다. 집 앞에서 이야 집 좋다라고 말했고 밝게 웃었다. 애써 밝은 척하려는 몸짓이 아니라 날다람쥐 1호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집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무언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지 말까? 그녀가 물었을 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그녀와 그는 들어갔다. 들어갔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고 있는, 한참 감정이 최고조로 치달은 상황을 그대로 목도했다.
먼저 두 사람을 알아본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더니, 그가 손을 잡고 있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날다람쥐 1호는 어쩐 일인지 순간 그녀의 손을 세게 꽉 잡았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어머니의 관자놀이 아래 파란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녀가 말할 틈도 없이 어머니는 달려들었다. 그녀의 기다란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지? 어디 뻔뻔하게 집까지...!
분노에서 경악으로 얼굴을 바꾼 아버지는 서둘러 어머니를 말렸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오늘 처음 본 사람이라는 말은 어머니에게 통하지 않았다. 당황으로 말문이 막혔지만 왜 이러세요. 아니에요. 를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힘을 써 어머니를 그녀에게서 떨어뜨린 후에야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아버지는 차마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면 상황이 악화될 걸 알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갑자기 말려든 일의 인과관계를 따질 틈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가 그 정신없는 와중에 그에게 휴대전화를 쥐어줬다. 날다람쥐 1호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어른인데도 그녀는 순순히 그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그가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미안.."
머리가 마구 뒤엉킨 그녀의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미안할 건 난데. 우리 부모님이 싸워서 잘못된 건데. 어리다고 해서 이게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정말 미안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과 얼굴은 그때도 그 후에도 항상 진심이었다.
"서러워서 안 되겠으니까.. 나 좀 울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정말 울었다. 무릎을 굽히고, 산발한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선 어깨를 들썩이며 낯선 이의 집 앞에서 울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날다람쥐 1호는 그녀를 위로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는데, 그 손이 너무 작아 위로가 되기엔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다독임에 더욱 서럽게 울었다. 충분히 이해되는 모습이었다. 그도 어머니가 다독여주면 더욱 서럽게 운 기억이 있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다정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괜스레 슬퍼졌다.
그날 이후로 날다람쥐 1호 앞에서 그녀가 운 적은 없었다.
그녀가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한대도 어쩔 수 없다고, 날다람쥐 1호는 생각했다. 그에겐 힘이 없었고 능력도 없었고 알량한 재롱 이외에 그녀의 환심을 살만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한참 울고 떨쳐버린 그녀는 후련하게 파하, 하며 숨을 한번 내쉬고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날다람쥐 1호의 손을 꽉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아버지의 폰을 꽉 쥐어잡았다.
"배고프다. 그지?"
발갛게 부은 눈을 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눈물냄새가 났다. 짭짤하고 상쾌한 향이었다.
그는 그녀와 김밥 떡볶이 라면을 먹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집은 자그마한 투룸으로 거실을 보자마자 날다람쥐 1호는 현관문 앞에 방이 바로 있네,라는 시답잖은 소리를 해서 그녀를 한껏 웃게 만들었다. 그때는 예의 없는 말이란 걸 몰랐고 그저 아까 울던 사람이 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더 많이 웃어야 될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그때 그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좀 서러운 마음을 눈물로 털어버리니 괜찮았다고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없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그 말은 자라나는 날다람쥐 1호의 마음 한켠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날다람쥐 1호를 그녀에게 부탁한 건 아직도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 중 한 가지였다. 왜냐면 아버지는 그날 그녀를 처음 보았으니까. 두 사람은 아이를 잃어버린 남자, 친절하게 그 아이를 데려다준 여자일 뿐이었다. 연결고리랄 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유 없이 그녀를 상처 주지 않았던가. 잘못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걸려 온 전화에, 그녀의 집 앞까지 온 아버지는 어린 그의 짐을 들고 있었다. 아들을 데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단정한 목소리로 사과를 하고 봉투를 건네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남아있다.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라고 거듭하면서도 아버지는 부탁을 거두지 않았다. 아버지와 그녀 사이에서 날다람쥐 1호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금방 올게."
아마 진심이었을 그것은, 그에겐 아주 멀리 간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큰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울면 다시는 안 올 것 같아 그는 고개만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