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열두 장, 잠 못 드는 열두 시간
첫 줄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결국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감이 코앞인데.....
ChatGPT 메모리는 고객사 이름으로 가득 차 있고, 내 머릿속은 온통 녹화 강의 교안 생각뿐이다.
사실 이게 별일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건 정말 '별일'이다.
나의 평소 강의는 부끄럽게도 상세한 교안보다는 학습자와의 소통과 즉흥적인 마인드맵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준비는 철저히 하지만, 그 자리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반응에 따라 강의 방향이 유기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게 내 스타일이었고,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녹화 강의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눈앞에 학습자가 없다. 이것이 얼마나 큰 공포인지 모른다. 반응을 즉각적으로 볼 수 없고, 질문도 받을 수 없고, 그저 카메라만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4시간짜리 강의를 15분 단위로 16개 모듈로 쪼개서 녹화해야 하는 상황. 이를 위해 1개 강의당 대략 10-12장의 슬라이드를 준비하며 밤을 새우고 있다.
"이건 좀 더 간결하게 정리해주세요."
"이 부분은 예시가 부족해요."
"전체적인 흐름이 매끄럽지 않네요."
내 머릿속 완벽주의자가 끊임없이 속삭인다.
각 강의가 서로 연계되어야 하니 디자인보다는 텍스트로 흐름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3일 동안 GPT와 열심히 토론 중이다. 인공지능이 칭찬하면 "아니, 그건 내 마음에 안 들어"라고 반박하고, 피드백을 주면 "그건 내 생각과 다른데..."라며 투덜거리고 있다.
화면 속 AI와 나 사이의 대화창은 이제 수백 줄을 넘어섰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동료처럼, 때로는 조교처럼 대하며 끝없는 수정 요청을 이어간다.
어떤 순간에는 내가 AI에게 너무 집요하게 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미안해, 다시 한 번만 수정해줄래?"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내 완벽주의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은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서 밤을 새우며 몇 번이고 수정했을 텐데, 이제는 AI라는 대화 상대가 생겼다.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요구에 응답해주는 인공지능과의 밀당은 어쩌면 내 완벽주의의 새로운 출구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그래, 이제 좀 괜찮아졌어"라고 생각하다가도 다시 "아니, 이 부분은 더 명확하게 해야 해"라며 새벽 3시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어쩌다 AI와 대화를 이렇게 집요하게 나누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놀랍다. 내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의 형태인지, 아니면 그저 마감 앞에 선 평범한 직장인의 몸부림인지.
여러분은 어떤가요? AI와 대화하면서 본인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셨나요? 아니면 마감을 앞두고 밤을 새워본 적이 있다면, 그때 당신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다음 이야기에서는 녹화 강의를 마치고 난 후의 기이한 공허함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카메라 앞에서의 4시간,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온 감정의 롤러코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