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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Jul 31. 2020

깜빡깜빡

이제 나이가 되었나



잠시 친정집에 얹혀살던 신혼 때였다. 아버지는 처음엔 부드럽게 다음엔 화를 내면서, 아니면 혀를 차면서 아침마다 남편을 깨웠다. “이군!” “이 서방!” 하며 점점 곱지 않은 목소리로 목청을 높이셨다. 처가살이에 눈치가 보일 만도 하건만 쇠귀신처럼 일어나질 않아 내 속을 태웠다. 한 번에 벌떡 벌떡 일어나던 우리 식구들의 모습과 달라서, 군기 빠진 사위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셨다.

겨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서면,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두고 봐라 이 서방이 곧 다시 올 테니…”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고 간 지갑이나 열쇠뭉치를 가지러 다시 들어오곤 했다. 엄마는 왜 결혼을 반대했겠냐며 엽렵하지 못함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못마땅해하셨다.

요즘도 언덕 아래의 골목 어귀까지 차를 타고 내려갔다가, 후진시켜 집으로 다시 오는 일을 자주 한다. 가까운 이웃들은 다 아는 버릇이다. 꽃밭에 물을 주던 옆집의 잭 할아버지도 뒷걸음쳐 오는 차를 보면 웃는다. 나도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오늘은 몇 분 만에 다시 돌아올 것인가를 점치곤 한다. 다른 일에선 꼼꼼하다는 소리를 듣는 남편도 그런 허점이 있어 종종 웃음거리를 제공한다. 집 떠나기 전에 현관에 서서 “원 투 쓰리” 하며 뒷주머니의 지갑, 허리춤의 아이폰과 어깨의 서류가방을 구호에 맞춰 챙기고서도 뭐든 한 가지는 빼놓는 것이다. 그나마 일찍 일을 시작하는 건축현장 일을 오래 한 탓인지, 아침 늦잠은 개선되어 종종 나를 깨워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감사할 일이다.

나는 약속이 잡히면 며칠 전부터 준비물을 미리미리 챙겨 차 트렁크에 넣어둔다. 만약의 경우뿐 아니라 만약의 만약까지 대비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편이다. 가지고 나갈 것은 몇 번이고 점검하고, 항상 20분 정도 일찍 가서 기다린다. 상대가 기대하는 것의 120%를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이랬던 나도 요즘은 머리가 오락가락하여 실수가 잦다. 여러 차례의 수술 후유증이라고 핑계를 대어 보지만 아무래도 노화현상이 아닐까 싶다.

곰국을 불에 올려두고 깜빡 잊고 교회에 갔다. 부엌의 자욱한 연기를 본 옆집에서 신고하였는데 집안은 사골 타는 냄새로 화장터 같았다. 창문은 뜯기고 소방관이 솥을 마당에 내 팽개치고 갔다. 장 봐 온 것을 잊어버리고 차에 싣고 다니다가, 회덮밥용 재료가 차 트렁크 안에서 곤죽이 된 적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상황들이 나이 듦의 징조인가 하여 처량해진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건망증과 치매 증상은 관련이 깊다고 한다. 치매를 방지하려면 등 푸른 생선, 카레, 잡곡밥, 와인이 좋단다. 카레가 주식인 인도에서는 치매 발병률이 1% 미만이고, 매일 포도주를 2~5잔 마신 프랑스의 할머니들이 머리가 좋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니 흥미롭다. 치매 예방법이 친구 만나기, 집 청소, 뜨개질, 스포츠, 종교 활동, 책, 신문 읽기 등등 많기도 하나 그중에 먹는 예방법이 가장 마음에 드니 오나가나 먹는 것을 밝히는 증세는 못 말린다.

밥상을 물리자마자 며느리가 날 굶겨서 배고프다고 보채는, 미운 치매 할머니 될까 봐 심히 걱정되는 아침이다. 오늘부턴 카레에 와인 한 잔을 줄곧 식탁에 올릴까 보다. 음식궁합이 맞거나 말거나 간에.


수필가 이정아


07302020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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