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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Aug 08. 2020

음식이 주는 위안

밥의 향기


수필가 이정아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대청마루 한 복판에 연탄난로가 있었다. 겨울의 기억일 것이다. 신문사에 다니시는 아버지는 글 쓰는 것이 직업인지, 술 마시기가 직업인지 모르게 늘 술이 취해 늦게 오셨다.

이른 저녁을 먹고 우리가 잠이 들 무렵이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따로 밥을 지으셨다. 난로 위에 끓이는 냄비 밥이다. 적당히 그을린 노란 양은 냄비가 생각난다. 거기에서 맛있는 밥 냄새가 나면 다시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면서 입맛이 다셔졌다. 그건 밥 냄새가 아니라 밥의 향기라고 해야 옳았다.

먹거리가 많지 않을 당시 우리 네 남매는 아버지 오시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렸다. 드디어 아버지가 오셔 상을 받으시면, 자다 깬 네 남매가 상 주위로 몰려든다. 하얀 쌀밥과 우리들이 먹던 것보다 돼지고기가 더 들어간 김치찌개, 구운 꽁치나 고등어 한 토막이었을 것이다. 새우젓국을 넣어 찐 계란찜 같은 것도 가끔 있었지 싶다.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끝까지 밥을 다 비우는 비정한 부정은 없으리라. 조금만 드신 아버지가 상을 물리면 네 아이들이 달려들어 태풍이 지난 것 같이 밥상을 쓸곤 했다. 그러면서늘 우리 아버지는 입이 짧아 좋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시절엔 하루에 밥 세끼 먹는 것을 큰 복으로 여겼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인사가 "식사하셨습니까" 일까.

쌀로 지은 밥을 유아기부터 늙을 때까지 '하루 3식'하던 것이 보통이었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점점 밥 먹는 이들이 줄고, 이민 연수가 늘어감에 따라 식생활 패턴이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밥 먹는 일에 관한 한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밥을 먹어야,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한다.

세계 인구의 반은 쌀을 주식으로 삼고 이들의 대부분은 아시아계의 인구이지만, 점점 아시아에서의 쌀 소비는 줄어드는 반면 서구인들의 식생활에서는 쌀을 찾는 인구의 비중이 높아져, 쌀을 조리할 수 있는 동양계의 요리사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기나 물처럼 아직까지는 필수적인 쌀도, 드넓은 캘리포니아 곡창지대에 사는 때문인지 사시 장철 함부로 굴러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무심히 보아 넘기다가는 먹지 못하고 벌레가 생기기 일쑤이다. 그러니 대수롭지 않은 쌀로 만든 밥이 무슨 매력이 있는가 말이다.

혹 저녁밥을 스파게티나 스테이크를 먹고 나면, "온 밤 잠이 깊이 안 든다"는 이도 있다. 밥에 대한 '향수파' 이거나 '수구파'들이다. 난 아직도 이에 속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아이는 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밥 보단 멕시코 음식인 타코나 부리또, 미국 음식인 햄버거나 프라이드치킨 이태리 음식인 피자나 스파게티를 더 좋아한다. 가끔 타이 음식이나 월남 음식을 사 먹기도 하는 모양이다.

2인용 밥솥이어도 짓는 김에 지어 놓으면 항상 밥이 남아서 버리게 된다. 밥이 아깝다는 생각도 없이 마구 버려왔다. 그래서 옛날 우리 어머니가 하듯 두 식구용 냄비(작은 가마솥)를 한국 상점에서 구하였다.

집에 와서 부엌의 막힌 하수구를 고쳐주던 한국분이 계시다. 연세 많으신 교회 장로님이시다. 저녁시간이 되었기에 식사를 권해보았다. 그만두신다 사양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러마고 하신다. 사실 난감했다. 밥은 하고 있었지만 반찬이 마땅치 않았기에.

"어쩌지요? 반찬이 없어서요"
"반찬이 없어도 좋습니다. 밥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염치 불고하고..."  그러면서 웃으신다.

부인과 얼마 전 사별하였다는 그분은 오래된 밥통의 누렇게 변한 밥을 주로 드시고, 가끔 햇반을 드시기도 한단다. 갓 짓는 밥 냄새를 맡으니 거절할 수 없었노라고 하셨다. 이것저것 밑반찬을 꺼내어 권해도 순수한 밥의 맛을 느끼고 싶다 시며 밥만 드신다. “밥이 이렇게 향기롭고 맛있을 수 없다" 하시면서.

우리는 얼마나 빈번히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는지 모른다. 만일 그 수를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다면, 아무리 고단한 삶일지라도 사는 일은 복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매일 맡게 되는 밥의 향기에서도 삶은 즐거울 수 있지 않을까?

08082020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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