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된 타인에게 얼굴과 이름을 돌려주는 법
스마트폰 손바닥만 한 스크린, 두 개의 세계가 나란히 떠오른다.
‘재벌 3세, 100억 대 주택 매입.’
‘OO 40대 노동자, 새벽 작업 중 사망.’
두 기사 아래 달린 댓글창은 각기 다른 온도로 끓어오른다. 100억이라는 비현실적인 숫자 앞에서는 “나는 평생 일해도 화장실 한 칸 못 산다”는 자조와 분노, 그리고 은밀한 선망이 뒤섞인다. 반면, 노동자의 죽음 앞에는 기이한 악의가 춤을 춘다. “공부 안 하더니 꼴좋다”, “누가 거기서 일하라고 협박했냐”, “원래 지병이 있었겠지”.
죽음 앞에서조차 멈출 줄 모르는 조롱의 향연 속에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잔인해졌는가.
단순히 악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리적 방어기제의 가장 비열한 형태다. 한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이 ‘시스템의 실패’ 때문이라면, 그 시스템 안에 살고 있는 나 역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 공포를 견딜 수 없기에, 우리는 피해자에게서 결함을 찾아낸다. “그가 부주의해서”, “그가 못나서” 죽은 것이라고 믿어야만, 나는 똑똑하고 조심성이 많으니 안전할 것이라는 가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조롱과 비하, 혐오는 그렇게 나의 불안을 잠재우는 마취제가 된다.
이 잔혹극의 배경에는 깊은 사회적 병리가 뿌리 박혀 있다. 자본주의가 종교가 된 이 사회에서 ‘돈’은 곧 ‘인격’이자 ‘계급’이다. 100억짜리 집은 숭배의 대상이 되고, 기름 묻은 작업복은 실패의 상징이 된다. 우리 사회는 무의식 중에 ‘가난한 노동은 죄’라는 폭력적인 신화를 내면화했다. 그러니 노동 현장에서의 죽음은 존엄한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의 당연한 결말’쯤으로 치부된다. 편리에 중독된 우리는 로켓배송과 새벽배송이 누군가의 뼈를 갈아 만든 것임에도 그 죄책감을 마주하기 싫어 피해자를 지워버리는 쪽을 택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 현상은 ‘얼굴의 상실’에서 기인한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적 책임을 느낀다. 하지만 뉴스는 노동자를 ‘O 모 씨, 사망자 1명’이라는 숫자로, 익명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그가 오늘 아침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 점심에 무엇을 먹고 싶어 했는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연인이었는지… 고유한 우주가 삭제된 자리에 남은 것은 처리해야 할 데이터뿐이다. 얼굴이 없기에 우리는 죄책감 없이 돌을 던진다. 이태원 참사 당시 영정과 위패 없는 분향소가 그토록 공허하고 기괴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력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름을 지우고 얼굴을 가리면, 애도는 불가능해지고 망각은 쉬워진다는 것을.
‘타자화’가 디폴트 값이 된 이 도시에서, 우리가 예술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다. 교과서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건조한 역사적 사실로 요약할 때, 소설과 영화는 그날 도청에 남았던 소년의 떨리는 눈동자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주먹밥의 온기를, 즉 지워진 ‘얼굴’을 복원해 낸다. 뉴스가 성소수자를 찬반 논쟁의 대상으로 다룰 때, 영화는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고 이별하며 아파하는 구체적인 ‘사람’ 임을 증명한다.
어두운 극장이나 방구석의 이불속에서 책을 펼칠 때 우리는 안전하게 타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정서적 리허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숫자 뒤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그가 비난받아 마땅한 어쩔 수 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나와 다를 바 없는 존엄한 생명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교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숫자로 납작해져 혐오의 먹잇감이 된 내 이웃에게, 다시 ‘이름’과 ‘얼굴’을 돌려주고 입체적인 ‘사람’으로 되살려내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마침내, 뉴스 한 줄에 스쳐 지나가던 그 낯선 타인의 이름을, 비난 대신 연민을 담아 나의 목소리로 불러주기 위해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의미들이 모여 이 차가운 혐오의 세상을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