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극장 개봉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
1980년대 파리의 밤거리,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필름 그레인, 그리고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가장 편안한 얼굴. 미카엘 허스 감독의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자극적인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 없이도, 스크린 너머로 온기를 전해주는 마법 같은 영화입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며 '가족'이 되어가는 이 따스한 연대기를 소개합니다.
1981년, 프랑스가 미테랑 대통령 당선으로 변화의 열기에 들떠있던 그때, 엘리자베트(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세상은 무너져 내립니다. 남편은 떠났고, 두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생계를 위해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전화받는 일을 시작합니다. 영화는 엘리자베트가 밤의 라디오를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거리의 소녀 '탈룰라'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서서히 자신의 삶을 회복해 가는 7년의 시간을 담담하게 비춥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뮤즈이자 파격적인 연기의 대명사였던 샤를로뜨 갱스부르.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는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커다란 안경을 쓴, 유약하고 불안한 생활인 '엘리자베트'로 완벽하게 변신했습니다. 유방암 수술 자국을 드러내거나, 자식들 걱정에 잠 못 이루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알던 '아이콘'이 아닌, 우리네 '엄마' 혹은 '이웃'의 얼굴입니다. 부서질 듯 위태로웠던 그녀가 아이들과 탈룰라를 품으며 점차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은, 샤를로뜨 갱스부르 연기 인생에서 가장 섬세하고 따뜻한 명연기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카엘 허스 감독은 단순히 80년대 소품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그 시대의 '공기'를 재현해 냅니다. 실제 80년대 뉴스 영상과 16mm, 35mm 필름으로 촬영된 거친 질감의 화면은 마치 낡은 가족 앨범을 넘겨보는 듯한 아련한 향수를 자극합니다. 조 다신(Joe Dassin)의 샹송부터 펑크 록까지 흐르는 사운드트랙, 그리고 늦은 밤 라디오 부스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들은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가 더 뜨거웠던 그 시절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제목 '밤의 여행자들'은 라디오 청취자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생이라는 긴 밤을 통과하는 우리 모두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엘리자베트의 가족은 혈연으로만 묶이지 않습니다. 갈 곳 없는 소녀 탈룰라를 기꺼이 방으로 들이고, 그녀가 다시 떠날 때도 잡지 않고 축복해 주는 이들의 관계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찰나의 순간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는 인물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밤의 적막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입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아 막막할 때, 혹은 세상에 나만 홀로 남겨진 것 같아 외로울 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라디오 DJ 반다(엠마뉴엘 베아르)의 나직한 목소리처럼, 영화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괜찮아요.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