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남자가 남긴 필멸의 족적

넷플릭스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

by 조하나


<스포있습니다>



신화의 종막과 불멸의 귀환, 그리고 시대의 장송곡


2013년 영국 BBC에서 첫 전파를 탄 이래, 1920년대 버밍엄의 범죄 조직을 다룬 <피키 블라인더스(Peaky Blinders)>는 단순한 갱스터 장르의 외피를 넘어선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적이고 거대한 폭력이 남긴 깊은 트라우마, 그 참혹한 폐허 위에서 진흙과 피를 뒤집어쓴 채 자본과 권력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했던 쉘비 가문의 서사는 전 세계 수많은 시청자를 매혹시켰다.


그리고 2026년 3월 20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Peaky Blinders: The Immortal Man)>는 장장 6개의 시즌을 거쳐 온 이 장대한 서사시의 진정한 마침표이자, 새로운 세대로의 이양을 알리는 엄숙하고도 처절한 장송곡이다.


스티븐 나이트(Steven Knight)가 각본을 집필하고 톰 하퍼(Tom Harper)가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시리즈의 시간적 배경을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옮겨놓는다. 버밍엄 대공습으로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가운데 폭력적인 과거를 등지고 은둔하던 토미 쉘비(킬리언 머피)는 나치와 결탁한 새로운 위협, 그리고 자신의 혈육인 아들 듀크(배리 키오건)가 연루된 거대한 반역의 음모를 마주하며 다시 한번 피비린내 나는 현실로 끌려 나온다.


이 작품은 전설적인 인물 ‘토미 쉘비’의 후일담이나 범죄 액션물의 연장이 아니다. 전쟁과 자본주의, 파시즘의 대두라는 20세기 전반기의 거대한 역사적 수레바퀴 아래서 한 인간과 가문이 어떻게 파괴되고 또 구원받으려 몸부림치는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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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쉘비’, 전설의 탄생


<피키 블라인더스>의 세계관이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깊은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단연 킬리언 머피(Cillian Murphy)가 연기한 ‘토마스(토미) 쉘비’라는 캐릭터의 독보적인 존재감에 있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광대뼈,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무한한 우울과 피로감은 토미 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기획 초기 단계에서 스티븐 나이트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1순위 배우는 킬리언 머피가 아닌,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액션 스타 제이슨 스타덤(Jason Statham)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배우를 모두 만났던 나이트 감독은 초기에 물리적 위압감과 압도적인 남성성을 뿜어내는 제이슨 스타덤에게 당초 배역을 맡기려 했다. 범죄 조직의 수장이라는 표면적 설정만 놓고 본다면,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폭력의 냄새를 짙게 풍기며 공간을 장악하는 스타덤의 캐스팅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처럼 보였다. 반면 킬리언 머피는 체격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내향적이며 사색적인 인상을 주었기에, 가혹한 버밍엄의 뒷골목을 주먹과 피로 지배하는 갱스터의 물리적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캐스팅의 향방을 극적으로 뒤바꾼 것은 다름 아닌 킬리언 머피가 나이트 감독에게 보낸 단 한 통의 간결한 문자메시지였다. “내가 배우라는 걸 기억하세요.” 이 짧고도 확신에 찬 문구는 나이트 감독에게 커다란 예술적 각성을 안겨주었다. 감독은 머피가 현실에서는 조용하고 평범해 보일지라도, 카메라 앞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다른 층위의 인간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변신’의 귀재임을 깨달았다. 육체적 현전에 의존하는 배우와 내면의 심연을 길어 올려 캐릭터의 본질을 재구성하는 배우의 차이를 인지한 것이다.


만약 제이슨 스타덤이 토미 쉘비 역을 맡았다면, <피키 블라인더스>는 근육질의 마초가 주먹과 총성으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범죄 액션물이나 마피아 장르의 관습적 답습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킬리언 머피의 캐스팅을 통해 토미 쉘비는 단순한 조폭 두목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이 남긴 지독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며, 텅 빈 눈동자 속에 허무주의와 고도의 지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상처 입은 지식인 범죄자’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킬리언 머피는 섬세한 안면 근육의 통제와 서늘한 침묵, 그리고 연약함과 잔혹함을 쉴 새 없이 오가는 이중적인 태도를 통해 ‘토미 쉘비’에게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이나 그리스 비극의 영웅과도 같은 철학적 깊이를 부여했다. 이는 곧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가장 깊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극적 모순을 만들어 내며, 시청자로 하여금 악인을 사랑하고 연민하게 만드는 강력한 윤리적 딜레마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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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지옥에서 국가의 운명으로


토미 쉘비의 궤적은 한 범죄자가 부와 권력을 축적해 나가는 세속적 성공담이 아니다. 그의 서사는 ‘개인’의 심리적 생존에서 시작하여 ‘가족(쉘비 가문과 갱단)’의 번영과 유지로, 나아가 ‘사회(버밍엄의 합법적 사업가이자 노동당 하원의원)’의 계급적 변혁으로, 그리고 마침내 ‘국가와 세계(파시즘과 나치에 맞서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운명을 건 거대한 사투로 점진적이고도 치열하게 확장된다.



참호전의 유령들: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개인과 가족의 붕괴


<피키 블라인더스> 서사의 기저에 깔린 가장 거대한 그림자이자 모든 비극의 원형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프랑스의 솜 전투와 베르됭 전투 등에서 땅굴을 파고 폭약을 설치하는 공병으로 복무했던 토미와 그의 형제들은 그곳에서 인간성이 철저히 말살되는 지옥을 경험했다. 전쟁은 한 세대의 청년들을 진흙탕 속의 도축장으로 몰아넣었고, 살아서 돌아온 자들조차 영혼이 파괴된 채 육신만 귀환해야 했다. 시리즈 초반부터 토미가 겪는 극심한 수면 장애와 환각, 그리고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한 아편에 대한 의존은 국가가 주도한 극단적인 폭력이 개인의 심리에 얼마나 영구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러한 개인의 트라우마는 쉘비 가문이라는 ‘가족’ 단위의 병리학으로 즉각 전이된다. 맏형 ‘아서 쉘비’의 통제할 수 없는 분노 조절 장애와 약물 중독, 가족 구성원들이 일상적으로 자행하는 맹목적인 폭력성은 모두 전쟁이라는 거대한 거세 경험에 대한 반작용이다. 이들은 국가가 훈장(토미가 받은 군사 훈장들)으로 포장해 준 살인의 경험을 버밍엄의 뒷골목으로 고스란히 옮겨왔고,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구조를 재생산한다.



자본과 파시즘의 대두: 사회와 국가로 번지는 위기


시리즈가 진행되며 토미는 합법적 사업가이자 하원의원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다. 이는 폭력의 무대가 ‘거리’에서 ‘의회와 사교계’로 이동했음을 의미하며, 그가 미치는 영향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마주하는 상류 사회의 정장 입은 권력자들은 뒷골목의 갱스터들보다 훨씬 더 부패하고 교활하다.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새로운 절망의 시대로 진입하며 서사의 범주를 ‘국가와 세계’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버밍엄 대공습으로 무너진 건물들과 밤하늘을 수놓는 독일 공군의 맹렬한 폭격은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끝난 것이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한층 더 끔찍하고 체계적인 형태를 띠고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영화 내에서 나치 스파이 존 베켓(팀 로스)이 주도하는 음모, 즉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동원해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내어 영국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키려는 계획(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베른하르트 작전이 모티브가 되었다)은 폭력의 양상이 물리적 총격전에서 보이지 않는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전쟁으로 진화했음을 시사한다. 토미는 이 거대한 역사의 쳇바퀴 속에서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치며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려 해도 결국 전쟁과 자본주의의 폭력이라는 시대의 거대한 진흙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뼈저리게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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