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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타로 Oct 27. 2018

‘차이’로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

'차이킴' 디자이너 김영진 인터뷰

한복을 동시대와 살아 숨쉬는 패션으로 격상시킨 한복디자이너 김영진을 한남동 차이킴 아틀리에에서 만났다. 패션위크 첫날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차이킴의 꼭두’ 패션쇼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녀에게 고궁 앞 퓨전 한복 논란에 대한 생각과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전하고픈 말을 물었다.


패션은 복고 열풍, 영화는 재개봉 열풍, 드라마는 리메이크 열풍이다. '예전에 히트쳤던 아이템'만큼 확실한 보증 수표는 없기 때문일까. 혹자는 한 가지가 유행하면 우후죽순 카피품이 나오는 세태를 비난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데, 그렇다면 새로움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맞춤 한복 '차이 김영진'에 이어 기성복 브랜드 '차이킴'을 론칭하면서 '패션 한복'이라는 신시장을 개척했다. 랩스커트와 비슷한 허리치마, 고려시대 문무관들이 입던 저고리를 변형한 철릭원피스는 트렌드에 민감한 2030 세대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김영진의 크리에이티브는 기성복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등장하는 19세기 이탈리아 여성 비올레타에게 선홍색의 한복을 입혔고, 국립창극단 소리꾼 수십명의 무대복도 만들었다. 영화 '해어화', '조선마술사' 의상 디자인에 이어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김태리 분) 한복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한복을 패션의 경지에 올려놓은 디자이너 김영진. 다름이 공존하는 세상을 바라며 '차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그녀는 '정체성' 이야말로 옛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창조성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연극으로 우리 멋을 알고, 스타워즈에서 한복의 미래를 보다


김영진은 어린 시절 한국무용을 하는 언니를 보며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언니의 여행가방에서 옷을 몰래 꺼내 입고 꼭두각시 놀이를 하면서, 무당춤이나 칼춤의 독특한 안무, 한복의 강렬한 색감에 빠져들었다. 한복의 비일상적인 색감과 독특한 샤머니즘적 느낌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


김영진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우리극을 했다. 또래들이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을 좋아할 때 고성 오방대, 칼춤, 마당놀이, 남사당패를 배우고, 민속학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어느 정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나이에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를 경험함으로써 남들과 다른 가치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복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그녀가 한복 디자인을 결심하게 된 것은 스타워즈라는 한 편의 영화 때문이다. "알렉산더 맥퀸이 스타워즈의 의상을 디자인했는데, 그 옷이 보그지에 실렸거든요. 일본 기모노의 선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인 의상이었는데, 굉장히 미니멀한 디자인이었죠." 김영진은 맥퀸이 동양 옷에서 미래를 봤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옷은 점차 미니멀해질 것이고, 그 경향이 평면재단을 하는 한복과 맞아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실제로 옷의 소재와 편안함을 중시하는 경향과 함께 한복은 일상복으로 스며들고 있다. 젊은 세대는 한복을 패션으로 즐기고, 한류의 주역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200에 오른 뮤직비디오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춤을 춘다.


한복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최근 서울 종로구청이 전통한복에서 벗어난 ‘퓨전한복’에는 고궁 무료입장 혜택을 주지 말자고 제안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와 같은 논란에 대해 김영진은 "한복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한복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 왔고, 오늘날에도 생활방식에 맞게 변해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김영진이 보기에 전통한복과 퓨전한복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대여 한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많은 건 퓨전 한복이라서가 아니라 낮은 품질 때문이다. 그러나 대여한복의 품질이 낮은 건 저렴한 가격에 한복을 즐기고 싶은 젊은 세대의 필요와 업체들의 사정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맞춤 한복 한 벌은 기본적으로 백 만원대가 넘어가요. 기성 한복도 젊은 세대가 입기에는 값이 비싸요. 그렇다고 이삼만원에 한복을 대여해주는 업체들에게 브랜드 퀄리티의 옷을 요구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죠.”


한복이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차이킴' 한복은 모시나 상주명주 같은 전통 소재도 쓰지만 실크 원단 등 각국의 다양한 소재를 쓴다. 프랑스 레이스, 인도의 사리 원단이나 해외의 원부자재를 쓰기도 한다. “실제로 옛날에 우리나라 양반들이 중국에서 실크 원단을 공수해서 옷을 해 입었어요. 1930년대 사진을 보면 여자들이 레이스 달린 한복을 입기도 했고요. 실크 한복도, 레이스 한복도 결국 우리 조상들이 입었던 옷인데 한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영진은 여성들이 입기 편한 바지 한복도 디자인했다. 그 중 하나는 통이 넓어 얼핏 치마처럼 보이는 말군복이다. "고려 시대엔 우리나라 여자들이 말을 타고 다녔어요. 왕비들이 왜적 물리치느라고 활도 쐈죠. 그래서 입은 게 말군복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한복과 다르다고 해서, 이걸 한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서 모티브를 얻어 현대식으로 재해석하다


김영진 한복의 모티브는 모두 전통 한복에서 나온다. 그림이나 관 속에서 나온 출토복식 등을 바탕으로 철저한 연구를 거친다. 고려시대 문무관들이 입던 철릭을 응용해 철릭 원피스를 만들었고, 16세기에 입던 연안김씨 저고리에서 모티브를 얻어 언발란스 저고리를 디자인했다. 단아한 느낌과는 거리가 먼, 레오파드 프린트의 한복도 주목받았다. "민화 중에 호피도라는 게 있어요. 호랑이가 잡귀를 막고 호방하기 때문에 민화 병풍에 자주 등장해요. 레오파드가 그 호피도에서 따온 거에요. 그만큼 우리가 호랑이를 사랑하고 호피, 즉 레오파드 문양을 사랑한 민족이었다는 걸 반영한 거죠."


그녀는 한복이 일상복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한복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중국 의상에 대해 많이 연구한 사람들이 '차이나카라'를 만든 것처럼, 한복도 다양한 복식과 조화롭게 입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도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몇 해 전 샤넬의 크루즈 컬렉션에서 칼 라거펠트가 한복을 재해석한 의상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영부인인 김정숙 여사는 해외 순방 때 양장에 두루마기나 버선 모양 구두를 매치했다. "시대가 변했고, 입는 사람들도 변했고, 우리가 더 이상 김치에 밥만 먹진 않잖아요. 한복도 시대에 걸맞게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면


모던보이, 모던걸이 거리를 휩쓸던 개화기 한성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고애신 (김태리 분)이 입는 한복이 김영진의 손끝에서 나왔다. 극중 어린 고애신은 팔 모양이 직선인 직배래에 깃이 올라간, 고름이 짧은 한복을 입는다. 신윤복 그림에도 나오는 신미양요 당시 18세기 후반의 한복이다. 다만 소재나 색감은 화면에 예쁘게 잡히도록 디자이너의 재량을 발휘해 선택했다. 누드 톤의 한복은 고애신의 지적인 느낌, 화려한 색상은 그녀의 단호하면서 선명한 성격을 반영했다.  


연극, 영화, 오페라에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의 무대의상을 선보인 김영진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주저 없이 함께하고 싶다고 전한다. 발레나 신창극 같은 새로운 장르도 관심사다. "판소리라는 게 그 시대의 아픔을 얘기해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거잖아요. 이 시대의 아픔을 이자람이라든지 요즘 젊은 소리꾼들이 얘기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동참을 많이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요."



옷으로 자기만의 색깔 찾기를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 옷이 어떻게 변했을까? 근대화와 식민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한복은 전근대의 산물로 인식됐고, 한복 문화는 단절됐다. 한복을 배척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변형해 입었다면 어땠을지 김영진은 상상했다. 그렇게 '차이킴'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정체성은 그녀 작업의 핵심이다. 우리 춤을 동경하던 어린 시절부터, 연극에 빠져 밤새 옷을 만들던 20대, 해외 패션 브랜드를 총괄하던 30대까지, 그녀가 축적한 경험과 관점이 '차이킴' 옷에 녹아 있다. 입는 사람에게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옷이길 바란다. "차이킴은 한복 브랜드가 아니라 패션 브랜드예요. 사람들이 한복 디자이너니까 누구나 다 한복을 입고 다니면 좋지 않겠냐 묻는데, 그게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끔찍한 세상이에요. 자기 취향을 가지고 입고 싶은 옷을 입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사람들이 입고싶은 옷을 만드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 "단아하고 우아한 사람도 있지만, 화통하고 유머러스하고 쿨하고,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더 끌리기도 하잖아요. 다양한 성격과 취향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한복을 만들려고 하고, 그게 제 한복의 재미인 것 같아요."


작업이 막힐 때는 박물관으로 간다. 한 사람의 재능이 선조들이 살아온 세월의 방대함을 이길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대의 '크리에이터'들을 만날 수 있는 박물관이 그녀에겐 영감의 원천이다.


패션 경기 위축으로 차이킴 매출도 작년에 비해 50% 떨어졌다. 장기적으로도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 경제가 지속되지 못할 거란 걸 그녀는 직감하고 있다. 어려울수록 젊은이들이 자기만의 색깔과 기준으로 세상과 맞서길 바란다는 염원을 전했다. "세상은 나를 지켜주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컨셉을 잡고 잘 사는 방법밖에 없어요. 남들이 다 오른쪽으로 갈 때 왼쪽으로 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죠. 인생이 길지 않아요. 좀비처럼 살 순 없잖아요."


 © 패션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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