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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un 24. 2017

34. 나도 돈을 막 쓰고 싶다

절약, 그 값싼 성취감

 얼마 전 7살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대부분 하루 일과 따위를 적어놨을 줄 알았던 일기장엔 의외의 생각들이 담긴 내용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돈에 대한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돈이 없어지면 좋겠다.'

 아무래도 7살의 나는 세상 수많은 문제의 원인이 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애초에 돈이라는 게 없으면 빈부 격차나 돈 문제로 인한 살인 사건 같은 것도 없을 테니까.

 그에 맞는 적절한 해결책도 제시해놨다. 내가 우유를 만드는 사람인데 빵이 필요하다면 빵을 만드는 사람에게 우유를 주고 빵과 교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빵값이 우유값보다 비쌀 수도 있다는 점은 간과했다만, 7살 소년이 바라본 어른들의 세상이 어찌나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가 삐뚤빼뚤한 활자를 넘어 그대로 전달되었다. 사람의 목숨이 돈의 가치보다 의미 없이 내팽개쳐지는 세상, 물질이 사람을 앞선 세상, 7살의 나는 도무지 이런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생각의 배경엔 내가 자라온 부유하지 못한 가정환경이 깔려있을 테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구멍가게 안에 칸막이를 쳐놓은, 네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공간이 우리 집이었다. 부모님은 밤낮없이 열심히 일 했지만 10년이 넘도록 단칸방 신세를 벗어나진 못했다.

 만약 우리 집이 부유했더라면,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아무 고민 없이 먹고 가졌더라면 저런 일기 따윈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뒤틀렸다 싶었다. 무언가 확실히 불공평했다. 원인은 돈이었다.


 돈. 돈은 보이지 않는 가는 실선 같았다. 가지고 싶은 것이 눈 앞에 있는데 돈이라는 선은 기어코 내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넘어진 그곳엔 가지고 싶은 것의 반토막이 자리했다. 그걸 손에 넣고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는 그 행위를 절약이란 이름으로 배웠다.

 가난했기에 부모님은 500원짜리 과자를 살 때도 신중했다. 불필요한 지출은 절대 금물, 새 것보단 빌려 쓰거나 물려받거나, 같은 물건이라면 무조건 더 저렴한 것으로. 그것이 내가 배운 절약이었다. 과포화된 상태에서 하나씩 삭제하려는 요즘과 다르다. 아무것도 없는 빈 도화지 위에서 한정된 재료로 조심스레 선 몇 개를 그어보는 것이다. 어떤 그림이 됐건 완성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릴 때 학습된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지금도 카페에선 먹고 싶은 라떼 대신 500원 더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편의점에선 사고 싶은 제품을 제쳐두고 1+1 상품 같은 것을 계산대 위에 올리고야 만다. 여행지의 숙소도 모든 숙박 사이트를 뒤져보고 나서야 최저가로, 그것도 쿠폰이란 쿠폰은 몽땅 긁어 모아 결제한다. 갖고 싶은 운동화나 옷을 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결제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최저가를 검색 해 구입한다. 그마저도 없다면 최대한 비슷한 제품으로 구매하거나 마음속의 장바구니에 영원히 처박아둔다. 구질구질한 나의 소비 습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절약이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은 구질구질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것이라 알고 있다.

 다행인진 모르겠다만 아껴 쓰는 행동은 절약이란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된다. 같은 물건을 나보다 비싸게 산 사람을 보면 알 수 없는 승리감이나 성취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사고 싶은 것을 쉽게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시켜 먹는 사람들을 보면 어리석다고 까지 느낀다. 그런 게 죄스러운 일인 것 마냥.

 아껴 써서 무엇을 얻게 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난 부유한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집은 가난하고 난 돈 없는 학생이잖아. 최저가, 보너스, 공짜 같은 단어를 들으면 흥분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그것을 쟁취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고. 아끼면 똥 된다는 말도 있지만, 아끼지 않으면 똥 만들 돈도 없을 수 있는 거잖아. 그저 절약은 미덕이었고, 그 말은 아낄 수밖에 없는 내겐 적잖은 위로였다.


 그런 내가, 절약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현명한 소비라고 생각해온 내가,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절약이 결코 현명하지만은 않았다고.

 물건을 살 때도,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친구 선물을 살 때도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가격표다. 무슨 색이 내게 어울릴까, 새로 나온 저 메뉴는 맛있을까, 그 친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생각하는 건 늘 그다음. 늘 다음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소비하는 걸까?

 나는 늘 포기했다.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제쳐둔 채 대체품으로 자리를 메꾸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땐 '다음에'를 되뇠다. 그런 포기가 잦아질수록 점점 포기가 무뎌졌다. 포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나이를 조금 먹고서야 그 포기가 어느 정도 무게의 서글픔을 안고 있는지 깨닫는다.

 현명하게 소비하지 못하면 죄책감이 생겼다. 절약이 가진 양면성이 그러했다. 절약하기 위해선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했고, 포기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떠안아야만 했다. 포기하거나, 감정의 무게를 견디거나. 소비에 있어 선택의 순간에 마주할 때마다 생기는 이 질문은 이젠 딜레마가 되어버렸다. 걱정 없이 소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사실 정답은 이미 나와있다. 돈. 돈이 정답이다.

 일기 속의 내 생각처럼 아예 돈이 없는 세상이 오지 않는 이상, 이 딜레마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돈이다.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되는 것이다. 그럼 더 이상 무리하며 절약할 필요도, 소비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이 쳇바퀴 같은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내게 돈이라는 힘이 없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한다.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더 이상 나의 절약에 값싼 성취감을, 나의 소비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나 정도라면 그만한 소비를 해도 괜찮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으면 좋겠다. 아니, 진짜로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라떼가 먹고 싶은데 500원 더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택하는 일은 이젠 그만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소비를 하고 싶다. 500원 아낀다고 뭐가 더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말은 사실 너는 더 좋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난 만족할 수 없다. 더 큰 능력이, 더 많은 돈이 생겨 가고 싶던 여행지를 맘껏 여행하고 싶다. 부모님께 좋은 집과 차를 사 드리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선물을 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도 돈을 막 쓰고 싶다. 정말, 돈을 막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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