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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y 14. 2018

기억 없는 날이 늘어가고 있다

오늘이 며칠이지?


EP3

기억 없는 날이 늘어가고 있다

오늘이 며칠이지?

기억 없는 날이 늘어가고 있다. 오늘이 며칠이지? 어제저녁은 뭘 먹었더라? 어제 누구를 만나긴 했던가?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잦다. 오늘 점심에 먹었던 음식이, 어제 만났던 사람이, 지난주에 했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물이라도 쏟은 걸까. 이 날이 저 날 같이, 저 날이 이 날 같이 이리저리 뒤섞여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라진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이 얘긴 곧 기억 없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루하루는 예측 가능할 만큼 재미없어졌고, '안정적'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채 빠르게 돌아간다.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생산하듯. 매일 같은 하루가 생산되다 보니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는 오늘 같다. 기억 없는 날은 그렇게 늘어간다.

기억되는 날들은 특별하다. 얼마 전에 누나가 출산을 하던 날, 몇 달간의 준비 끝에 올린 공연의 첫 막을 연 날, 난생처음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날. 그래서일까, 나는 특별함을 쫓아 늘 새로운 것에 손을 댔다.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 새로운 지역, 새로운 만남, 새로운 경험. 이는 '도전'과 같은 멋진 말로 포장되어 스스로가 나아가고 있다는 자기 위안 또한 얻게 했다.

지금은 얻을 것에 대한 기쁨보다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커 도전 아닌 도전을 한다. 한 번뿐인 인생, 화끈한 무언가를 꿈꾸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용기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리스크가 적은 도전들에 손을 뻗게 된다. 이를테면 도미노 피자의 신 메뉴를 시킨다던지,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구입한다던지. 경제가 불안해지면 명품 립스틱 같은 화장품의 판매량이 급증한다고 하지 않던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자아실현의 욕구는 해외여행, 명품 백, 외제차 장만이 아니라 립스틱 구입이나 맛집 탐방 정도로 표출되는 것이다.

최근에 알게 된 신조어로 '존버'라는 단어가 있다. 혜민스님의 <비로소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서 이외수 시인이 혜인스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사용했던 단어로, '존나 버틴다'는 뜻이다.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존나게 버티면 된다'는 정신을 담고 있는 단어다. 결과가 어떻든 일단 존나게 '버티면' 된다니, 왠지 서글픈 단어다. 언제부터 하루하루가 버텨야 하는 인생이 되어버렸나. 플랭크는 버티면 배에 왕자라도 생기지, 이 인생은 버티면 뭐가 나올지 예측도 안 된다.

어찌 보면 배부른 투정 일지 모른다. 훈련병 시절 손발이 얼 때까지 훈련받았던 날이나 유럽행 비행기를 놓쳐 그 자리에서 경비를 다 날려버렸던 날을 생각해 본다면 차라리 이 인생 그대로 존버가 낫다 싶기도 하다. 그런 날도 어떤 의미로는 특별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으래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특별했다. 그러나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은 특별함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 이 삶은 매우 버틸 만하다. 더욱이 버틸 만 하다는 게 도리어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군생활하며 지금과 같이 재미없는 인생을 얼마나 그려왔던가. 첫 휴가를 나와 내 방 침대에 누워 세상을 다 가졌던 건 또 어떻고. 존버 할 수 있는 인생, 이렇게 보면 감사히 여겨야 된다. 어차피 내 인생에 로또는 없다. 그러니까, 기억나지 않는 날에 염증을 느꼈다면 방금과 같이 끔찍한 기억들을 끄집어내자. 상대적으로 편한 지금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예를들면, 입대날 같은. 아, 갑자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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