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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Oct 14. 2016

11.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파도 돼요, 슬퍼해도 돼요.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무리 걱정해봤자 해결되는 일 없어. 그냥 잊어버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걱정하고 싶어서 걱정하는 게 아니잖나.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걸 난들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바야흐로 위로의 시대다. 그렇게 느꼈던 게 언제부터였던가. 아마도 '힐링'이란 단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 '힐링'이란 단어가 등장했을 때는 새삼 거부감이 들었다. '힐링'은 게임에서 힐러(치료자)가 대미지(부상)를 입은 캐릭터에게 행하는 치료행위 아니던가. 힐링(healing)이란 단어는 치유라는 뜻인데, 그 말은 고로 힐링을 받는 본인을 '환자'임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이지 않은가. 예전에도 출처 모를 영단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웰빙(well-being). 웰빙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 '힐링'은 '웰빙'이 유행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웰빙은 이제 '국민소득도 좀 올라갔겠다, 이제는 너도 나도 건강 챙겨가며 잘 살아보자'같은 사회적 풍조-마치 '새마을 운동'이나,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뜻의 IMF 이후 생겨났던 운동)'같은-를 담은 '운동'같은 느낌으로 무언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좋게 바꿔 보자는 것처럼 느꼈졌지만, 힐링은 뭐랄까, 무릎에 자그맣게 난 생채기 정도로 '나 너무너무 아파요'라고 엄살 부리는 느낌이랄까. 그럴 만도 한 게, 힐링이란 단어가 등장한 이래로 각종 매스컴, 광고, SNS, 심지어는 뉴스에서까지 이 '힐링'이란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아니, 도대체 얼마나 병들었길래 너도 나도 치유받자는 거야.'하는 삐뚤어진 생각이 든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여태껏 이 단어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머리 끝에 달린 당근을 쫓는 당나귀처럼 너도 나도,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 나섰으니까. TV 프로그램에는 '힐링 캠프'같은 프로그램이 생겨났고, 힐링 여행, 힐링 음악, 힐링 푸드, 힐링 카페 등 전국 각지에선 말 그대로 '힐링' 열풍이 일어났다.(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전국에 환자가 이리도 많았나, 싶었다.


 차차 '힐링'이란 단어에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이 단어를 사용했을 때였다.

 어려서부터 엄마는 일밖에 모르고 사시던 분이었다. 우리 집은 어릴 적 굉장히 가난했기에, 부모님은 주말도, 휴일도 없이 1년 365일을 일만 하고 사셨다. 그간의 고생을 내 생애에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의 부모님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쌀과 김치를 팔던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것으로 시작해 지금은 탁구장 관장님으로, 엄마는 여전히 일 밖에 모르고 살고 있다. 그런 엄마가 어느 날 밥을 먹다 한 마디 툭 던졌다.

 "엄마, 여행 갔다 오려고."

 '여행? 갑자기 엄마가 여행을?'이란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좋은 곳으로 여행을 좀 다녀오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탁구장을 비우고 가니'라는 대답만 했으니까. 역마살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여행 얘기라도 들은 걸까, 오색찬란한 자연을 담아낸 여행 프로그램이라도 시청한 걸까. 엄마의 입에서 여행을 가겠다는 말이 흘러나오게 된 그 출처가 궁금해졌다. 아니, 그보다도 엄마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고 얘기한 게 처음인 것처럼 느껴져 그 변화의 이유가 궁금했다, 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늘 나만 챙기기 바빴던 엄마 아녔던가. 뭐, 이유야 어찌 됐든 내겐 매우 반가운 얘기였다. 그동안 혼자 여행을 다녔기에 죄책감이 웬만큼 쌓일 대로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도 이 좋은 걸 보고 느꼈으면 좋겠는데'하던 생각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던 시기였던 것이다.

 엄마는 친구와 단 둘이 3박 4일, 필리핀의 보라카이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나기 전, 제대로 된 여권 하나도 없던 엄마를 위해 직접 증명사진을 찍어주고 여권을 발급받았다. 사진을 찍으며 바라 본 엄마의 얼굴은 낯설었다.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뚫어져라 엄마의 얼굴을 가까이서 봤던 게 언제였더라. 사진을 여러 장 찍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세히 보게 된 엄마의 얼굴. 엄마의 얼굴엔 세월이 지나간 흔적들이 바람이 만들어 낸 사막의 표면처럼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갑자기 여행을 떠나겠다던 엄마, 그런 엄마의 여권 사진을 찍어주는 아들. 생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엄마를 위해 아들이란 놈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사진을 찍어주는 일뿐이었고, 카메라를 든 아들 앞에 보인 엄마의 얼굴은 낯설도록 상해 있었다. 이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엄마 얼굴의 잔주름들, 그중 아들놈이 가담하지 않은 것이 없을 거란 생각에 물컹하는 것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차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뷰파인더에 눈을 묻어버린 채 카메라를 천장을 향하게 했다.

 이윽고 새 여권을 발급받은 엄마는 보라카이에 다녀왔다. 여행을 다녀온 엄마는 놀랍도록 변해있었다. 뷰파인더 속 비쳤던 상한 얼굴은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고, 싱글벙글 웃으며 여행 다녀온 얘기로 집 안을 밝게 밝혔다. 그곳에서 먹은 음식 얘기, 마사지받은 얘기,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해변가의 석양 얘기, 모래사장 위 샌드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작품 얘기... 그리고 그 얘기의 끝엔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친, '댕-'소리 나게 만드는 한 마디가 있었다.

 "엄마 정말 힐링하고 왔어."

 힐링. 그렇다. 아니꼽게 바라봤던 '힐링'이란 단어가 필요한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엄마였다. 엄마는 그동안 병들어있었던 것이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힘든 일상에, 탁구장을 관리하며 생기는 사사로운 감정싸움에,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들 딸 때문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밀린 집안일 때문에. 엄마는 정말로 치유가 필요한, 힐링이 필요한 환자였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이유로 일상에 치이고 다치는 환자들이란 것을. 눈으로 보이는 아픔이 아니더라도 계속된 응원과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존재들이란 것을. 언제나 강하기만 한 것 같았던 엄마의 입에서 힐링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엄마 본인도 무의식 중에 본인이 지칠 대로 지쳐있고 병든 상태임을 고백해 버린 것이다.


 여행을 떠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연기함은 어쩌면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힐링하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행위의 중심엔 늘 불안하고 불완전한 내가 있었고, 그런 나를 극복하고 싶고, 환기시키고 싶어 선택한 행위가 바로 그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여행을 떠남으로써 느꼈듯이, 나 또한 쌓일 대로 쌓인 묵은 감정과 스트레스를 배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힐링을 몸소 실천하던 건 다름 아닌 나 본인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힐링'이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런 감정 해소의 행위를 '힐링'이란 단어로 표현했던 것이고, '보이지 않는 병'에 걸린 전국의 환자들은 본인의 아픔을, 고통을 이해해주는 단어 '힐링(치유)'의 등장에 열렬히 환호했던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괜찮다 괜찮다 말하면 괜찮다 끝도 없이 '강한 멘탈'을 요구하는 우리 인생에서 힐링이란 단어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합법적인 위로, 응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극복해내지 못해도 괜찮아요. 아파도 괜찮아요. 당신은 환자니까요. 환자가 아픈 건 당연한 거니까요.'


 끊임없이 쏟아지는 걱정의 홍수 속에 온 몸으로 비를 맞아내는 유약한 그대가 있다. 당장 이번 달 내에 해결해야 할 집세가, 내일까지 끝내야 할 프로젝트가, 끝이 보이지 않는 군 전역일이 걱정인 그대가 있다.

 걱정하지 마라. 라디오에선 '걱정하지 말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티브이 속 연예인들은 너도나도 '파이팅', '힘내세요'를 외친다. 그 중심엔 언제나 그대가 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 위로가 당연한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걱정되는 것이, 아픈 것이, 힘든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것이다. 모두가 응원하고 있지 않은가.

 지칠 대로 지친 그대에게 어느 노랫말처럼 '아무 걱정하지 말고 노래나 부르자'는 얘길 건네고 싶다. 지나간 건 뭐, 그것 나름대로 의미 같은 게 있겠죠. 알 바야, 쓰레빠야. 그냥 우린 눈누난나 노래나 부르자고요.

 걱정, 안 해도 돼요. 동시에 이건, 나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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