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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나를 위해

by Pearl K

아무리 노력해도 손으로는 투명한 물길을 오랫동안 잡을 수 없다. 우리 삶도 그렇다. 겨우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손틈 사이로 다 흘러나가 버려 흔적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방금 전까지는 삶이 조금쯤은 충만해졌던 것 같은데 아차 하는 사이에 텅 비어버린 빈 손만 쳐다보게 되기도 한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외롭고 그럴 때마다 또다시 한없이 서운하고 서러워진다.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이제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그때 내가 충분히 마음을 쓰지 못했던가. 사소한 오해들이 쌓여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기 전에 참지 않고 풀었어야 했나. 배려하려 하지 말고 작은 서운함들을 때가 지나기 전에 톡톡 터트려 짜냈어야 했던가. 나의 이상함은 도무지 융합이 안 되는 특징을 가졌었나. 오만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온통 휘저어 놓기 시작하면 피곤하던 눈이 충혈되어 때끈해져 가고 복잡한 머리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다.


지난해 급작스럽게 여러 사람을 떠나보내느라 충분히 애도할 시간조차 없었던 탓인지 어떤 즐거움도 심드렁해진 지는 오래되었다. 늘 보던 OTT도, 좋아하던 음식들도, 이것만큼은 내 천직이라 여겼던 일도,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쳐버린 것들도 그저 휩쓸고 지나가버리는 한낱 바람 같이 느껴진다. 기계적으로 맡은 일을 해내고, 유명하다는 작품을 보고 맛집을 찾아가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심심하고 입은 쓰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꾹꾹 채워가던 매일의 글쓰기와도 담을 쌓은 지 오래다.


번아웃이니 우울증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기엔 왠지 증상이 애매한 것 같은데, 그 둘이 모두 아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상태라서 큰일이다. 몇 주 전에는 혼자서만 수백 번쯤 되뇌었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입밖에 냈다. 너무 진심이었는지 괴로워하는 나를 위로하려던 옆지기가 너무 크게 충격을 받아 멘털이 휘청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또 그렇게 많이 미안해졌다. 호르몬 때문인지 며칠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울어대다가, 며칠은 또 멀쩡히 강아지랑 산책도 하고 요리도 한다. 이렇게 보니 원래도 어딘가 조금 이상한 구석이 많았지만 점점 더 감당할 수 없게 이상해지고 있는 듯하다. 지금은 나도 나의 이 마음을 섣불리 정의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닐까.


그래, 나에게는 지금 수만 번쯤의 리프레시가 필요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일단 사소한 것들을 하나씩 바꿔본다. 늘 쓰던 베개커버와 이불을 갈고, 싸구려로 구입해서 몇 년을 쓰다 죄다 해어져버린 화장품 가방도 바꾼다. 여기저기 보풀이 일어난 휴대폰 충전기를 바꾸고, 핸드폰 케이스를 바꾸고, 휴대폰 화면마다 온통 벚꽃을 채운다. 청소기 먼지통을 비우고 필터를 비운다. 기다리던 마음을 비우고, 슬퍼하는 마음을 비우고, 타인에 대한 기대를 모조리 내려놓고 그저 무의 상태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것을 비워내다 보면 새로 채우고 싶은 마음이 언젠가는 생기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변화가 고플 때면 네일을 받으러 간다. 한 달에 한 번, 손을 많이 쓰는 직업을 가져 매번 건조하고 갈라지다가 찢어지기까지 하는 내 손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덤이다. 언제나 시술하는 순서가 있다. 먼저, 작은 드릴을 이용하여 기존의 네일을 어느 정도 갈아낸다. 그 위에 리무버와 오일을 발라 불렸다가 도구를 사용해 긁어낸다. 갈라져 버린 손끝을 파일로 문질러 평평하게 하고, 여기저기 보풀처럼 튀어나온 큐티클은 큐티클 가위로 정리한다. 길어버린 손톱을 자르고, 건조한 손 위에 보습제를 발라주면 제거 시술은 끝이다.


이제 깨끗해진 손톱 위에 새로운 색의 네일을 칠해야 한다. 색상을 선택하는 것이 첫 번째다. 네일을 칠하는데도 순서가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선택한 색을 한 번 바르는 것으로 끝나는 단순한 작업은 아니다. 손톱 보호를 위한 베이스 네일을 바르고, 그 위에 선택한 색을 적게는 두 번에서 많게는 서너 번까지도 바르고 또 바르며 덧칠을 한다. 너무 얇지 않게 그러나 너무 두껍지는 않게, 최적의 발색을 손톱 위에 구현해 내는 것이 기술이다. 중간중간색을 덧바를 때마다 빛을 이용해 젤을 굳힌다.


매번 그때의 취향이나 니즈에 따라 매번 새로운 색을 조합해 보거나, 다양한 스티커와 파츠를 활용한 아트를 요청하기도 한다. 모든 색을 칠하고 파츠까지 붙이고 나면 맨 위에 탑코트를 두어 번 덧바른다. 탑코트는 색과 아트를 고정하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 자, 이제 마지막 순서가 남았다. 손톱 뿌리 부분에 오일을 발라 보습과 건조방지를 하고 손등 위에는 촉촉한 크림을 발라 마무리한다. 네일을 받고 나면 지저분하던 손이 깨끗해지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마치 보풀이 잔뜩 일어난 옷의 보풀을 모두 제거하여 새 옷처럼 된 것 같을 때의 기분이랄까.


남들은 다 화장을 배우는 스무 살 때부터 피부가 건강하지 않아 화장을 할 수 없었기에, 꾸미고 싶은 마음을 유일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네일 아트였다. 주로 집에서 셀프로 칠하다가 첫 네일을 받은 것이 벌써 20여 년 전이다. 띄엄띄엄 시간이 나고 돈이 생길 때 가끔씩 가다가 젤네일로 바뀐 후로부터는 꽤 꾸준히 해온 것이 어느새 7~8년쯤 된 거 같다. 그래서인지 네일 아트라는 것은 나에게는 조금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 아무 평가 없이 내 얘기를 공감하며 들어주는 사람이 바로 네일숍 원장님이었다.


답답하던 마음들을 풀어놓고 손을 맡기면 힐링과 리프레쉬가 일어났다.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들 때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사실이 알게 모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의 내일에는 네일아트가 필요했다. 나에게 또 다른 내일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네일을 받으며 수다를 떠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전히 그런 것 같다. 오늘처럼 원하던 네일을 받고 온 날에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걸 보면 말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엉망진창인 글이나마 쓸 용기가 생겼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는 부채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언가 써내야 하는데 아니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 좋은 창구가 되어 주었었는데 풀어놓을 곳이 없는 게 아닌데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쓰는 방법이라고는 아예 몰랐던 사람처럼 모든 것이 초기화된 느낌이다. 욕심을 부려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아서 그냥 손을 놓아버렸더니 점점 더 무엇을 쓰기가 어려워졌다. 짧은 SNS 글은 쓸 수 있겠는데 긴 글이 낯설어졌다.


과연 다시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글을 쓰지 않아도 삶은 바쁘게 지나갔다. 입속에서만 맴돌던 수많은 말들을 뱉어내고 싶었는데, 그저 하소연일 뿐 의미 있는 글이 잘 되지 않았다. 내 삶의 모든 상황들이 답보 상태가 되니 글쓰기도 삶을 닮아갔다. 생각을 정리할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글로 표현하기가 힘든가 보다. 한동안은 이렇게 툭툭 던져두는 글만 겨우 쓸 것 같다. 무엇이라도 썼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어느 정도 분주함이 정리되고 나면 다시 써볼 생각이다.


내일의 나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 그래도 무언가는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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