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도 스위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예상할 수 없는 타이밍에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때로는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경험들에서, 그때는 흘려보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축적되어 있던 것들,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공포 등 예측불가하게 요동치는 여러 가지 낯선 감정들은 때로는 평온했던 일상을 위협하고, 자꾸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나쁜 마음들을 먹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모든 감정들이 너무 차올라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그냥 스위치를 꺼버리면 더 이상 힘든 감정에 얽매여 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수년 전 재밌게 보았던 미드 뱀파이어 다이어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다. 뱀파이어가 되어 좋은 점은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을 때 그냥 꺼버리면 되는 거라고. 감정뿐만 아니라 죄책감이나 죄의식마저도 함께 꺼버릴 수 있으니, 인간을 먹이로 삼는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특성상 오히려 그 편이 불필요한 실수를 줄이는 일이라고.
어디에나 생각이 다른 경우는 있어서 주인공들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한 명은 감정과 죄의식을 꺼버리고 인간을 사냥하지만, 동생은 감정과 죄의식을 오롯이 느끼면서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여 먹으며 살고 있는 걸로 표현되었다. 나에게 내 감정과 죄책감을 꺼버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사실 죄책감이나 죄의식까지 꺼버리고 싶진 않다. 그것마저 없으면 최소한의 도덕성도 결여될 테니까. 단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밀려드는 이 감정의 파고를 너무 출렁이지 않게 조절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최근 Empath(공감각자), HSP(초민감자) 등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각각의 성향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보는 테스트도 있다.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모든 테스트에서 충분히 높은 득점을 기록했다. 이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다른 이들은 평범하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감정의 허들이 내게는 유독 매번 태산처럼 거대해 보인다는 뜻이다. 때로는 낮은 산도 있고 언덕이나 둔덕도 있고 가끔 높은 산이 있어야 버틸 힘이 생기는데, 매번 끝을 알 수 없는 에베레스트가 눈앞을 가로막으니 그 순간마다 불필요한 힘과 시간을 더 쏟아도 겨우 기본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어떻게 보면 HSP(초민감자)란 뱀파이어와 같은 감각을 지닌 사람들일 수 있다. 위에 예로 든 드라마의 설정상 뱀파이어가 되면 오감을 비롯한 모든 감각들이 인간보다 최소 10배 이상 증폭된다고 한다.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나, 아주 먼 거리에서 속삭이는 소리, 어디에선지 모르게 나는 맛있는 냄새나 악취, 저 멀리서 뛰어가는 모습, 무엇보다 인간의 혈액이 흐르는 것을 감지할 수 있으며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증폭되어서 느껴지면 매사에 더 예민해질 수빆에 없을 테니까 스위치가 주어졌을 때 그 모든 감각들을 꺼버리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상담을 받을 때도 상담사는 나에게 감정을 경험하는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과민한 거 같다는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모든 감정을 과도하게 받아들이니 스스로 더 힘들어지는 거라고, 감정이 휘몰아칠 때마다 평소에 느끼는 감정 분량의 70~80%만 받아들이는 게 나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에는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동안에는 그나마 격한 감정들을 가라앉혀 주는 무던한 짝꿍을 만나 평온한 척이나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은 정신 차릴 틈 없이 거대한 사건사고가 자꾸만 벌어졌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연 준비로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느라 감정 같은 건 느낄 새도 없이 '일단 나중에'라며 접어두었다. 어떤 것이든 넘치면 탈이 난다고 그렇게 미뤄둔 감정들이, 억눌렸던 마음들이 공연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려 할 때 뒤늦게 쓰나미로 밀어닥치며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
꾹 눌러두느라 역으로 추진력을 얻었는지 생각보다 파급이 굉장했고 꼭 당장 죽을 것만 같았다. 끝없이 쏟아지는 감정사태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제로 내 감정의 스위치를 꺼버리기로 결정했다. 감정은 무시하고 꺼버렸는데 괴로움은 어디에서든 터져 나오게 되는지,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온갖 증상들이 온몸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염증이 안 생기는 곳이 없고, 남들은 다 덥다는 날씨에도 오한이 들었는지 오들오들 추웠다.
그렇게 꺼버린 감정을 온몸으로 피부로 배앓이로 겪으며 겨우 버텨내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요즘이다.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이 모든 시간과 감정들이 나중에 뒤돌아보았을 때 그랬었지 하고 추억할 수 있는 시간으로 지나가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좋은 부분도 괴로운 부분도 교차하며 살아가는 거니까. 조금만 버티면 또다시 웃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희망마저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정말로 전부 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