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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철, 나무 한 철

by Pearl K

이유도 없이 내내 추웠다. 몸이 너무나 춥고 으슬으슬해서 4월까지도 히터와 열풍기를 함께 틀었다. 직무 특성상 넓은 공간에 혼자 있는 데다가 사무실이 반은 양지 반은 음지에 있어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다. 바깥 풍경은 분명히 봄인데 출근만 하면 온몸이 시리도록 춥고, 집에 돌아가면 갑자기 너무도 더워 자는 내내 선풍기를 틀어놓았다. 내 몸의 온도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몸의 일교차가 점점 크게 느껴지는 게 왠지 낯설다.


유일하게 바깥 구경을 할 때가 점심을 먹으러 이동할 때인데, 막상 나가보면 추운 실내와는 다르게 따뜻한 봄빛과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나를 반겨준다. 최근에는 날이 풀리면서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점심을 먹고 학교 건물을 두어 바퀴 돌며 쪼그라들어버린 차가운 몸에 광합성으로 햇살을 가득 채워준다.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고 책을 나르느라 온통 굽어있던 허리와 쿡쿡 쑤시던 어깨를 펴고 온몸에 골고루 혈액순환이 되도록 햇살 아래 기지개를 켠다.


점심시간의 루틴 덕분에 아무것도 없던 텅 빈 나무에 꽃망울이 화려하게 터지고, 연한 새순이 돋아나는 장면을 며칠 혹은 몇 주 간격으로 타임랩스처럼 볼 수 있었다. 겨울 지나 앙상하던 나무마다 꽃들이 차오르고 하얀 백목련과 노란 알알이 맺힌 산수유,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벚꽃에 샛노란 개나리, 교문 앞을 지키는 백매화까지 꽃마다 각자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바깥은 이렇게도 화창한데 도서관에만 들어오면 어둡고 그늘졌다. 내 마음도 주변 환경에 따라 밝았다가 흐렸다가 하며 갈팡질팡했다,


자꾸만 산란해지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여기저기 지천인 벚꽃을 사진으로 담았다. 수십 장의 벚꽃 사진 중에 가장 예쁜 사진 두어 개를 골라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 두었다. 일하다가 피곤한 마음이 들 때 모든 창을 최소화하고 벚꽃 사진에 시선을 두었다. 몸은 실내에 있지만 사진 덕분에 잠깐이나마 꽃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여러 번 세찬 비가 내렸지만 기특하게도 쉬이 떨어지지 않던 벚꽃들이 길 위에 꽃무늬를 그릴 때쯤 나무마다 연둣빛의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꽃 반, 새순 반으로 알록달록하던 나무는 일주일 사이에 어느새 초록빛으로 꽉 찬 여름 의상을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바탕화면을 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화사해 보이던 벚꽃이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는다. 바깥 날씨에 맞추어 신록으로 가득한 배경을 장착할 때가 되었나 보다. 눈부실 정도로 쨍한 날씨 덕분에 연두색부터 진한 초록색까지 물들어 가는 풍경이 더욱 잘 보이는 나무의 철이 왔다. 바탕화면도 새 옷을 갈아입었다. 여전히 옆에서는 열풍기가 돌아가고 있지만, 잘 고른 사진 한 장으로 자칫 놓칠 뻔했던 이 빛나는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젯밤엔 10년 전 데이트할 때 사용했던 사진 어플을 오랜만에 들여다보았다.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사진 속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 모습이 충격적일 정도로 차이가 났다. 당시에는 스스로 외모에 자신이 많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너무 젊고 예뻤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도 한 철이고 나무도 한 철인데 나의 젊음도 한 철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1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이 시간 역시도 아름다운 젊음의 한 시절이겠지 싶다. 그러니 오늘을 더 사랑하고 이 시간을 행복하게 채워서 살아야지. 더불어 나의 마음도 매일 더 화창해지기를 바란다.



꽃 한 철도 나무 한 철도, 나의 젊음의 한 철도 놓치지 않고 충분히 누리며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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