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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있는 동안에

by Pearl K

나이 서른 후반도 되지 않아 찾아온 갑작스러운 백내장과 노안은 내게 너무도 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눈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이유도 모른 채 두통을 앓고 두통이 너무 심해 토하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항상 왼쪽 눈이 좋지 않아서 왼쪽 눈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문제가 생겼던 건 오른쪽 눈이었다.


백내장을 확인하고 수술을 결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만 다행히도 좋은 병원을 만나 수술을 할 수 있었는데, 수술하기 전 동의서를 받을 때였다. 의사는 망막박리가 일어날 가능성을 설명하면서, 잘못하면 실명될 수 있다는 무서운 말을 덧붙였다. 깜짝 놀라 숨을 들이쉬는 내게 의사는 항상 최악의 경우까지 설명을 하는 거라며 그럴 확률은 1%도 안 되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겨울방학 시기의 휴가를 이용하여 백내장과 난시, 근시를 한 번에 잡는 수술을 했다. 언제나 병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희박한 확률을 간발의 차로 뚫어버리는 편이라 만약의 경우가 일어나지 않을까 진심으로 두렵고 무서웠다. 정말 눈이 아예 안 보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며, 밤에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는 보이지 않을까 봐 최대한 수술한 눈을 건드리거나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회복기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한 번에 교정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어. 노안을 고치는 건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저 더 이상 토하지 않고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가까운 것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먼 곳을 볼 때는 전보다 시야가 선명해진 것 같기도 했다.


오른쪽 눈의 수술을 끝낸 의사는 왼쪽 눈은 아직 괜찮으니 10년쯤 후에나 오라며 농반진반인 말을 건넸었다. 호기롭게 장담하던 의사의 말과는 정반대로 10개월도 지나지 않아 왼쪽 눈마저 백내장 진단을 받았고, 나는 10년 전에 했던 라섹을 포함하여 세 번째 눈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 수술을 하며 나는 모든 과정을 글로 기록해서 박제해 놓았다. 두 눈을 모두 수술하고 회복했지만 아직도 가끔 너무 피곤한 날엔 눈앞이 흐려지며 잘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충분히 쉬고 나면 회복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두려워지곤 한다.


얼마 전, 두 텀 동안 함께 글을 썼던 북극성 동기이자 '파이널리 미'라는 놀라운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포토그래퍼 차경 작가가 이번에는 사진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글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을 읽으며 함께 합평하고 나누었던 글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랜 시간 혼자 견뎌내야만 했던 그녀의 고통을 솔직히 나누어 주는 부분에서는 함께 눈물이 나기도 했다. 책 제목이 "볼 수 있는 동안에"인데 읽는 동안 눈이 아예 안 보일까 봐 두려움에 떨었던 5년 전 내 모습이 기억났다. 그래서 이 책이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살아오면서 겪은 진한 고통의 시간들이 남일 같지 않아 읽는 내내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그 시간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결핍이 아닌 강점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모습이 너무나도 멋졌다. 얼마 전 참여한 북토크에서도 차경 작가는 시작 전엔 '너무 떨려서 토할 것 같다'라고 말하더니, 막상 북토크가 시작하자 이런 자리가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달변을 쏟아냈다.


그녀가 책을 써 온 지난 과정을 짧게나마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일까? 북토크 시간 중 마련된 파이널리 미 내레이션을 체험해 보는 시간에 자꾸만 울컥울컥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낭독하는 목소리가 너무 따뜻하고 좋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편으로는 몹시 부럽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나 역시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책 한 권을 출간하고 싶다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막연했던 소망들을 구체적으로 준비해 갈 용기가 조금 생겼다.


마지막으로 나를 뭉클하고 두근거리게 한 그녀의 문장들을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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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5

평범한 사람들처럼 똑바로 보는 게 세상 어떤 일보다 가장 힘들었던 나는 눈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담아내는 포토그래퍼로 살아오면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깊이 있는 작업인지 배웠다.


내 생의 마지막 순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떤 얼굴로 기억되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하고 현재에 가려져 그간 외면해 왔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다 보면 지금의 삶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애써 마주하지 않았던 자신을 더 깊이 안아주게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만약 이 책이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내내 미뤄온 독자에게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다면 내게 큰 위로가 될 것 같다. 수없이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당신의 가슴을 두드릴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다.


P.56

내겐 사진기의 뷰 파인더 너머로 상대를 사랑하는 방식이 더 익숙하다. 카메라로 가려진 눈으로 상대를 깊이 들여다보고 빛나는 모습을 기록하며 선물하는 순간들로 나의 사랑을 켜켜이 쌓아왔다.


P.62

흑백 사진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는 그들을 따라 네 시선도 함께 머물렀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이상한 균열이 생겨나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나를 성심껏 위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눈이 불편한 나를 진심으로 배려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그 사진으로 나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을 거라는 뒤늦은 자각이 찾아왔다.


P.94

다르게 찍고 싶었다.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고 뒤늦게 사정을 알고 머쓱해지는 상황에 나를 방치하고 싶지도 않았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모두 함께 삶과 죽음을 공감하며 끄덕이고 안아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P.157

나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이 좋다. 그걸 기록하는 사람이 나라서 좋고, 그걸 기록하는 순간을 맞은 게 좋다. 한 컷을 찍어도 어째서인지 그 사람의 온 삶을 통틀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찍은 것 같아서, 그리하여 그가 보내준 넓은 마음에 보답이 될 것만 같아서, 빚을 갚을 방법이 그것뿐인 것만 같아서.


P.158

그림자를 감추고 일부러 드러나지 않게 애쓸 필요는 없다. 해가 떠오르거나 지듯, 삶의 어떤 순간엔 그림자가 길어지기도 할 테지만, 그게 싫다고 해서 그림자 자체를 무시하거나 없애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P.194

이젠 나의 결핍이 어떻게 나만의 강점이 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지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더 이상 불필요하고 복잡한 질문으로 나를 괴롭힐 시간 따윈 없었다. 나는 그저 나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펼치면 될 뿐이니까.


P.224

하나 쓸모없어지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견디며 애쓴 흔적은 어딘가엔 남겨두고 싶어진다. 우리가 어떤 고유성을 띤 얼굴로 살았는지 사는 동안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는지 기록해두고 싶다. 조금도 유명하지 않지만, 엄연히 세상에 존재한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야기. [중략] 사라질 사람들, 하지만 존재했던 이야기들.


P.231

사는 게 힘들어.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잊고 있던 나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곁눈질하느라 바빴고 힘들 때면 내 마지막이 어서 당겨지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삶의 의미 시간의 의미 이 순간의 의미. 보는 것이 허락되는 순간까지 지금의 나를 기다려주고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열심히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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