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인이다'의 메인 작가로 일해 온 김영숙 작가님이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쓴 책 '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를 완독 했다.
처음에는 그저 편안하게 읽어 내려갔다. 다양한 자연인의 에피소드도 흥미로웠고, 함께 글을 쓰는 동안 만났던 글들도 원래도 좋았지만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잘 다듬어진 부분들을 보면서 반갑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여러 문장들을 메모장에 적어 넣으면서 읽기도 했다.
그렇게 술술 읽어 내려가는 중에 어느 순간 예상치도 못하게 눈물이 왈칵 흘렀다. 왜였을까? 황급히 읽던 책을 덮어놓고 손수건을 찾아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더 이상 눈물이 안 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더 큰 울음이 터져 도저히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소리 내어 엉엉 울 뿐이었다.
나를 그렇게 울게 한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는데 아마도 위로와 공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잘 모르는 이들에겐 가볍게 보일 수 있는 아토피는 실제로 겪는 사람에겐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기에, 나는 항상 아픈 아이였고, 아토피가 심해서 일어나는 몸의 변화로 아이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거나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애써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실은 그동안 계속 괜찮지 않았었나 보다. 아픔을 겪은 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무어라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아도 그저 담담히 곁에서 들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진짜 위로가 이 책엔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읽는 동안 여러 번 나도 모르게 울컥울컥 거렸다.
처음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을 때 영숙샘은 마감에 쫓겨 써야 하는 글 말고 다른 글을 쓰고 싶다고, 하지만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이 뭔지 모르겠다고 하셨었다. 김영숙 작가님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마음에 깊이 담겨 있던 글을 마음껏 쏟아내어 보여주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어두운 길을 걷고 있느라 지쳐버린 많은 이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만의 빛을 찾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Ps.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중쇄도 축하드려요!!
P.161
괜찮아진 겉모습과 달리 전혀 괜찮아지지 않은 마음. 그 간극이 커지니 마음은 자주 무거워지고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쌓일수록 고독의 깊이는 더해졌다. 숨길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야기. 아무렇지 않다가도 순식간에 나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았다.
P.165
어떤 형태의 결핍을 안고 태어났듯 자라면서 결핍을 안게 됐든 간에 누구든지 조건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되며 어른이 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제 스스로가 존재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리로 이미 아는 말이고 자주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참으로 이상적인 말이지만 그만큼 실현 불가능한 말이 또 있을까?'
P.170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접받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나를 궁금해하고 나에 대해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마치 40년 넘게 살았지만 이제야 나를 사귀고 있는 것 같은 마음. 그렇게 조금씩 나를 만나는 시간은 혼자여도 괜찮았다.
P.207**
결국 우위를 재고 따지는 대신 진짜 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나는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자고 하는 모든 일에서 왜 굳이 행복에 반하는 감정들을 끌어들여 힘듦을 자초하는지, 마치 불행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처럼 구는지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나를 힘겹게 하는 감정들을 모두 이 하나의 질문으로 걸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버려 보자고. 보이지 않는 눈을 떠올릴 때 그랬듯 오히려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한 틀이 해답일지 모르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가장 넘기 힘든 산은 언제나 나였던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눈들을 신경 쓰고 내가 만든 수많은 편견에 싸여 나라는 산을 넘느라 나는 본격적이기도 전에 이미 지쳤고 초라해졌다. 그러니 이제 마음이 힘든 일은 그만하고 그저 단순하게 딱 한 가지만 묻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P.213
'존재 자체로 수용받는 것.' 이 당연한 말이 얼마나 지켜지기 어려운 말인지 나 역시 절절히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힘든 속내를 알면 알수록 모종의 확신 같은 것이 생겼다.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조건도 없이 고유한 존재로 수용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한 사람의 인생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P.220
혼자라고 느낀 그 순간 생각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선의가 나를 채웠고 절망이라고 생각한 자리에서 계획하지도 않았던 희망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마음의 균열은 점점 커져, 그동안 내가 예측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숱한 일들로 전전긍긍하며 살았구나. 어리석게도 내 통제.밖의 일들을 위해 온 힘을 낭비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까지 다다랐다.
인생의 상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변수로 가득하다는 것을 이제야 온몸으로 체득하며 늘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누구의 인생이든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뼈아픈 일을 겪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P.224
마치 삶과 죽음이 이렇게까지 맞닿아 있다고 경고라도 하듯 줄줄이 전해져 오는 소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마치 서로 다른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는 듯한 혼란에 빠졌다.
P.232***
그런 시간을 통과해 본 사람이라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 어떤 삶의 사건들도 결국 자신의 가치를 손상시키지는 못했다는 것, 비록 수없이 흔들렸겠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이 응축돼 지금에 도착했기에 우리가 지나온 모든 시간은 모두 의미 있었다는 것까지도.
P.233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은 툭하면 튀어나오는 내 마음의 소리였다. 아마 나만 아는 수치, 실패, 결핍의 단면들이 오래 묵어 스스로를 평가하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 삶의 조각들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나를 마주하면 보이는 것이 있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최선의 선택을 했으며, 모든 것에 진심이었는지, 홀로 애쓰며 감당해냈는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