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은 날 두고두고 사랑할게

by Pearl K

최근 몇 년간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중에 '인생 녹음 중'이라는 채널이 있다. 대화할 때 재미있는 사건들이 많아서 부부의 대화를 일상적으로 녹음하기 시작했던 어떤 부부의 채널이다.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구독자가 10만이었는데 어느새 100만이 훌쩍 넘는 구독자를 보유할 정도로, 두 사람의 티키타카나 부부의 즐거운 대화, 귀여운 캐릭터가 생동감 있게 숨 쉬는 결혼장려 채널이다. 서로 결이 맞는 배우자가 얼마나 인생에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볼 때마다 사실 심하게 많이 부럽다.


어제 날짜로 결혼 9년 차를 꽉 채웠다. 오늘부터는 10년 차 부부로 들어서는 첫날이다. 요즘 처음의 마음이 많이 당연해지고 사소한 일에 쌓였던 불편함이 좀 더 크게 느껴지는 그런 날을 지내는 중인 것 같아 고민도 되고, 반성도 하지만 또 그런 상황이 생기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다들 이 시기쯤이 그렇다고 해서 과연 나도 그럴까 했었는데, 새로운 각오가 필요해진 시점이 왔나 보다. 이제부터는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막혀있던 대화를 뚫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서먹해졌나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니 오랜 난임으로 해야 할 숙제들과 마음의 괴로움이 늘어나면서 서로 속 얘기를 제대로 하기 힘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최소한의 대화 말고 깊이 있는 대화가 점점 사라졌단 생각이 들어 제대로 된 대화를 다시 해보고 싶어졌다.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2시간이 넘게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다른 사람인 척 꾸미지 않고, 나다운 모습으로 있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더 느꼈던 게, 서로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거였다. 그렇기에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근데 얼마 전 믿고 싶지 않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남편에게 그랬다. "처음에 우리 만날 때 진짜 말이 잘 통하고 대화도 끊기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대화가 줄어든 것 같아." 그랬더니 남편이 "난 말을 한 적이 없는데..?"라고 대답하는 거다. 너무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한참을 웃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짜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다시 깊이 있는 대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 얘기만 들어달라고 하기보다 내가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판단하고 추측하다 마음 상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안 좋은 방향으로 결론을 내기 전에 그의 의도와 마음을 직접 물어보고 받아들이려는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져야겠다고 반성하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한참 연애할 때 들었던 우리의 러브스토리에 연관된 노래 몇 곡이 있다. 먼저, 가장 달달할 때 자주 듣고 부르던 노래는 어쿠스틱콜라보의 '묘해, 너와'다. 설렘의 시간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보고 싶어 신기하고, 신기해서 보고 싶고/이상한 일이야. 누굴 좋아한단 건."이라는 대목이 참 묘하게 좋았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는 김동률의 '내 사람'을 들었다. "지친 하루에 숨이 턱 막혀올 때/한 사람은 내 옆에 있다는/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어서/그냥 씩 웃고 말아도 되는 참 편안한 사람" 가사에 공감하며 그런 내 사람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었다.


결혼 후 함께 사는 시간이 일상이 되어가며 폴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이 귀에 맴돌았다. "너의 품은 항상 따뜻했어/고단했던 내 하루에 유일한 휴식처/긴 말 안 해도 눈빛으로 다 아니까/ 한 송이의 꽃이 피고 지는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 해." 그렇게 다정하고 몽글몽글한 순간이 계속될 줄 알았는데 삶의 고비와 시련이 찾아오고, 서로의 일이 고되고, 난임시술을 하면서 맘처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대화는 사라지고 각자 할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 직장동료 같은 부부 사이가 되어갔다.


"혼자인 것만 같아. 늘 다른 곳을 향한 너의 시선도/이미 익숙해졌나 봐. 너의 맘 어디에도 난 보이지를 않아./사소한 다툼들에 변명조차 하질 않아. 어느새 익숙해 화도 나지 않고./겹겹이 쌓여가는 감정들에 지쳐만 가. 점점 더 외로워지는 것 같아." 거미의 '혼자'라는 노래의 가사가 너무 내 맘 같아서 부르며 들으며 참 많이 울었었다. 서로의 삶이 지치고 피곤하니까 사소한 것들에 예민해지고 별 것 아닌 일에 마음이 상했다.


김동률과 이소라가 함께 부른 '사랑한다 말해도'의 가사가 그 어떤 노래보다 절절하게 다가왔다. "난 네 앞에 서 있어. 너는 생각에 또 잠겨 있네/함께 있어 더 외로운 나. 어쩌다 이렇게/난 네 앞에 서 있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채/떠오르면 또 부서지는 수없이 많은 말/나를 사랑한다 말해도/네 눈빛이 머무는 그곳은, 난 헤아릴 수 없이 먼데/너를 사랑한다 말해도/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두 눈이. 말라버린 그 입술이/ 너를 사랑한다 말해도/금세 침묵으로 흩어지고 네 눈을 바라볼 수 없어/너를 사랑한다 말하던 그 뜨거웠던 마음이 그리워져/그 설렘이, 그 떨림이."


요즘은 다시 이석훈과 소향이 부른 '감사'의 가사를 곱씹어 보고 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불안하고 감정기복이 심한 내가 안정감과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역시나 든든하게 나무처럼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고 사랑해 준 남편 때문이라는 걸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마워하기보다 당연하게 여기고 내 짝꿍을 괴롭게 한 건 내가 아니었을까. 사실 어떤 관계든 시련이 없을 수 없는데, 어려움을 악화시키는 건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를 잊는 것이 아닐까. 쑥스럽고 왠지 어색하지만 이제야 노래 가사를 빌려 고마운 마음을 전해보려고 한다.


"힘든 기억도 견뎌낼 수 있던 건 함께 웃고 울던 그대 때문에/고된 하루에도 미소 짓는 건, 항상 힘이 돼 준 그대 때문에/많이 부족한 나겠지만, 이런 나라서 미안해지지만/평생 동안 온 힘 다해 사랑할 내 사람이 그대라서 감사해. 그대여야 하니까/눈물 나게 감사해. 사랑을 빚진 나니까./ 고맙단 짧은 몇 마디로 갚을 수는 없겠지만 남은 날 두고두고 사랑할게."


#결혼기념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