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에세이 ▒ 2016미술주간 - 올해의 미술도시 대구
199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예술가의 숨길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 계명대 미술대학이 자리한 대명동 캠퍼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골목 곳곳에는 자신만의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개인 작가들의 화실과 화방이 뿜어내는 예술의 향기가 있었다. 건물 외관은 화려하지 않지만 화실에 들어서 본 그들의 작품은 한국미술역사의 현재 이 순간을 간직한 보물처럼 밝게 빛났다.
2016미술주간이 시작된 10월 11일, 올해의 미술도시로 선정된 대구를 찾았다. 대구 남구 계명대 대명캠퍼스에서는 10월 12일부터 ‘2016미술주간’의 특별 행사로 ‘예술가의 작업실 기행’을 준비하느라 조용한 가운데 분주했다. ‘여느 문화행사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고요하지만, 미술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 무엇보다 크리라’는 기대와 함께 미술초보 기자는 혼자서 행사보다 하루 빨리 ‘예술가의 작업실’을 기행해보기로 했다.
먼저 예술가들의 열린 광장인 계명대 미술대학을 찾았다. 작업실 투어 출발지인 극재미술관2층에서는 경북조각회의 정기 조각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감각적인 토끼와 말 조형물이 기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또 알록달록 아름다운 색깔을 입힌 나뭇가지 형상의 모빌을 보며 “감각 있는 젊은 작가의 작품인가보다”라는 기자의 혼잣말에 극재미술관 윤영태 관장은 “이 작가분의 연세가 70이 넘으셨어요. 원래 작품이라는 게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감각스러워지는 법이죠”라고 웃으며 답했다.
예술가의 작업실을 보러 온 미술초보라고 소개한 기자에게 관장은 “미술은 대중과 가까워야 한다”며 “일반인들도 작품을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고, 또 궁극적으로 작가들도 작품을 대중들에게 선보이며 작품을 사고 팔 수 있어야 우리 미술이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환영의 말을 건넸다. 캠퍼스 정문을 향해 내려오다가 오픈캠퍼스 코스인 미술대학 아담스관을 찾았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니 붓을 들고 기자 체격만한 크기의 큰 캠퍼스에 각자만의 작품을 그리며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계명대 회화과 4학년 엄수희(24) 씨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신중하게 붓을 움직였다. 대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향 대구에서 꿈을 키워나가는 그에게 지역 예술작가로서의 자부심이 있냐고 물었더니 수희 씨는 “지금은 붓을 잡지 않는 현대미술이 대세이지만 붓을 잡는 회화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있다”며 “앞으로도 이 붓으로 나만의 회화 작품을 그리고 대중들과 소통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예술가 작업실 기행’을 기획하는 데 큰 힘을 실어준 대구 지역 작가이자 계명대 미술대학 학장인 장이규 학장은 “일반인들이 미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토대가 되는 미술대학 캠퍼스를 살펴보고 꿈나무들이 커가는 모습들도 함께 볼 수 있도록 캠퍼스 내 미술대학 강의실도 이번 프로그램에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예술가 작업실 기행 코스는 학교 캠퍼스를 출발점으로 캠퍼스 밖에 분포해 있는 미술작가들의 작업실을 둘러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현재 대명 캠퍼스 주위에는 60여 명의 미술작가들이 화실을 꾸려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구 출신으로 계명대나 주변 학교에서 미술 전공을 하고 독립적으로 학교 주변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대다수다. 장 학장은 “순수미술계가 어렵다는 말이 많지만 이곳의 작가들은 후배와 선배가 서로를 이끌며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동진, 이인성, 이쾌대 등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낳은 대구는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작가를 양성하는 미술대회, 전통적인 갤러리, 미술시장을 대표하는 경매와 아트페어, 시민들의 문화 공간인 미술관, 신진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으로 한국 미술의 역사를 써내려 가는 중이다.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를 거닐다보니 옛 추억도 떠올릴 수 있었고, 묵묵히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꿈나무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가슴에 담고 캠퍼스 밖으로 나섰다. ‘예술가 작업실 기행’ 코스 중 정문 밖 골목을 지나는 B코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대명동 예술가 거리는 서울 인사동 거리처럼 정돈되지도 않았고 세련된 느낌은 없었다. 심지어 1층에 멋진 인테리어로 꾸며진 화실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코스 안내자의 손이 가리킨 화실들은 대부분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은 호프집, 밥집 간판이 그대로 달려 있는 곳들이었다. 다니는 사람이 없어 매장 주인들마저 떠나버린 거리에 화가들이 들어와 작업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생 혼자 고독했지만 사후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는 ‘반 고흐’도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러한 거리 곳곳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지역 화가들이 고마웠다.
꽤 긴 거리를 둘러보고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예진우 작가의 화실에 들렀다. 계명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대명동에 둥지를 튼 지 20년이 넘었다는 예 작가는 이곳의 터줏대감이라고 했다. 화실에는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이 잘 나타나있는 누드화와 어두운 톤 속에 강한 인상이 매력적인 인물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상반된 느낌의 아름다운 여성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깨끗한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작품을 소개해 달라는 기자의 말에 예 작가는 “그리스 신전 같은 조형물이 있는 비현실적인 공간 속 맑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풍선 등을 통해 현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특히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바라보다 보니 기자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화실 한쪽에는 통기타도 두 대나 있었다. 김성진 작가는 예 작가가 수준급 기타 실력을 가지고 있다며 귀띔했고, 예 작가는 “좀 치는 편”이라고 너스레로 응수했다.
“왠지 화가라면 고뇌에 가득 차 있을 것 같고 다가가기 힘들 것 같았다”는 기자의 말에 예 작가는 “화가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며 “대중들과도 더욱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이번 예술가 작업실 기행이 그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몇 시간 동안의 꽤 긴 동행취재를 마친 미술초보 기자는 대구가 올해의 미술도시로 선정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십 년 전부터 디지털 시대인 지금까지도 회화, 조각 등 순수 미술을 고집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온 예술가들의 혼이 깃든 열정. 그것이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대구지역 미술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