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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Sep 07. 2017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33 아이캔스피크

그녀가 진짜 말하려고 했던 것


나는 고발한다, 나옥분 여사의 민원 투쟁기

용산 구청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호봉 특급 승진을 한 9급 공무원 박재민. 그는 명진 구청으로 발령을 받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첫 출근을 한다. 그러나 얼핏 보기엔 평화로워보이는 명진 구청은 한 명의 불청객으로 인해 갑자기 폭풍우라도 휘몰아친 듯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돌풍의 핵심은 나옥분 여사(73세). 그녀는 투철한 고발정신으로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하는 민원머신이다. 민원의 종류는 다양하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골목에 버젓이 세워둔 입간판, 누군가가 버린 담배 꽁초, 개인사유지이나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담벼락, 그리고 상가 재개발을 목적으로 건물에 황산 테러를 가하는 사람 등...


그냥 좀 못본 척, 못들은 척 넘어가면 좋으련만, 나옥분 여사는 한 건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다 민원을 넣는다. 민원 담당자였던 말단 공무원이 6급으로 승진하여 팀장 타이틀을 달 때까지도, 그녀의 고발정신은 여전히 투철하며, 빈틈이 없다.



옥분의 증언, I can speak!

한 편, 공무원의 꽃이라는 <9급 공무원> 재민 역시 만만치 않다. 나옥분 여사의 민원에 원칙으로 맞서는 젊은이의 패기. 그러나 도통 맞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둘 사이에도 접점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영어라는 것 이었다.


옥분은 우연히 재민이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그 좋아하던 민원 제기도 미뤄두고 재민만 쫓아다니며 영어 선생님이 되어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7급 공무원 시험을 앞둔 재민은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옥분의 끈기와 우연의 콜라보로 월, 수, 금, 주 3일, 무보수로 그녀의 영어 선생님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재민.


영어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70이 넘은 나이에 연필을 깎아든 옥분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하우 아 유?"라는 질문에 "아이 엠 파인, 땡큐. 앤 유?"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오는 경지에 이른다. 알고보니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떠나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남동생과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영어를 배운다는 옥분의 말에 괜히 코끝이 찡해진 재민은 두 남매의 상봉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옥분이 영어를 배우게 된 이유에는 한가지가 더 있었다. 오랜 친구 정심이 하던 일을 언젠가는 <직접 도와야 할 날>이 올 것 같다는 육감 때문이었다. 꽃처럼 어여쁘고 착한 친구 정심. 그렇게 예뻤던 한 떨기 소녀는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치매 걸린 노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옥분에게 <그 날>이 다가온 것이다.

 

친구의 뜻을 대신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영어를 배웠던 옥분은 그렇게 60년 만에 가슴아픈 상처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친어머니와 친 남동생 역시 외면했던 그 시절의 상처. 그것은 재민이 가르쳐 준 영어 덕분에 점점 아물기 시작한다.



<아이캔스피크>에 드러난 강박성 성격

옥분은 명진 구청 공무원들의 기피 대상 1호다. 그녀가 구청에 떴다하면 다들 떨어지지도 않은 펜을 줍는 척 하느라 허리가 휘어진다. 빼곡하게 파일 안을 메운 증거 사진들과 민원 신청 서류들, 한 손에 움켜쥔 대기 번호표 뭉치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옥분은 대단한 원칙주의자다.


원칙, 규칙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숫자나 정렬에 집착하는 사람들. 이들은 뛰어난 도덕성과 투철한 고발정신으로 완벽만을 추구하는 강박성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옥분 역시 불의, 비도덕, 몰상식 등 양심과 원칙에 위배되는 일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강박의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불안이다. 내면의 불안을 잊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강박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한 곳에만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다. 옥분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불안이 있다.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울타리의 부재로 열 세살 꽃다운 나이에 자살까지 시도했던 그녀.


어쩌면 옥분은 외로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 민원 제기에 급급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수수방관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약자들을 돕기위해 끈질긴 고발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올곧은 성향 때문에 무뚝뚝하고 인색한 사람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강박성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여유가 없을 뿐. 게다가 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는 능률이 오르는 무대 체질이기도 한 그들.


옥분은 피해자가 몸사리고 오히려 가해자가 길길이 날뛰는 세상의 아이러니에 맞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

모두들 가슴 속에 초자아를 품고 산다. 안되는 건 안되는것이고, 되는 것만 잘 하라며 엄격한 선생님의 역할을 하는 초자아. 그것은 사회 생활에는 젬병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인격이 된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에 맞서 생존을 위해 진화를 거듭해 온 우리 인류는 약육강식, 힘의 논리 앞에 아주 초라한 개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 세상에는 자신의 초자아에 따라 행동하는 양심이 극히 드물게 되었다. 양심과 정의. 초등학생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온 착하게 살라는 말. 그것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위해 투쟁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냥 봐도 못본척, 들어도 못들은 척 하라는 이야기였지.


그러나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했던가. 모두가 침묵할 때 자신의 초자아를 당당히 드러낸 나옥분 여사는 우리 사회를 보다 양심적으로 만들어 주는 헤로인으로서 모두에게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타의 모범이되고 귀감이된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울분에 찬 나옥분의 "빠가야로!"라는 외침이 그토록 사이다처럼 내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 것은.




<아이캔스피크>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이야기, 오직 옥분이기에 가능했던 그 증언에 대해 유쾌하게 풀어낸 휴머니티가 있는 영화다. 감히 <택시 운전사>의 계보를 이어, 바른 역사를 바르게 표현한 영화라고 평하고 싶다.


+ 휴지 꼭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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