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차리니 애가 넷!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4명이 아빠 없이 자던 날, 애니메이션 영화에 흠뻑 빠진 2, 3, 4호와 달리 1호는 깔아 둔 이불 위에 누워 핸드폰 삼매경이었다. 언젠가 이야기해야지라고 마음먹었지만 좀처럼 틈이 나지도, 용기가 나지도 않았던 말을 전할 절호의 시간이었다.
"작은 엄마랑 아빠는 oo이가 12살 답게 살았으면 좋겠어."
짧은 대화 끝에 눈물을 참으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우는 아이의 어깨를 도닥이며, 감사함과 미안함, 안타까움이 뒤섞여 나도 코끝이 찡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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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처음 만난 당시 10살짜리 내 시조카는 부끄러움이 많지만, 곰살맞은 아이였다. 쭈뼛하던 몇 번의 만남이 후 부쩍 친해진 우리는 종종 시댁 구석에 둘이 앉아 학생생활이나 배워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영어학원을 다녀보고 싶다는 1호의 말에 좋은 생각이라고, 부모님과 상의해 보자고 하고, 형님(그 당시엔 나에게 그런 존재가 있었다.)에게 이야기했다.
"동서, 그럼 3, 4호를 받을 사람이 없어서 안돼."
생각해 보니 늘 그랬다. 주말에 시댁에라도 오면, 아직 어린 막내 때문에 기저귀부터 애착이불까지 짐이 한 보따리였는데, 그 짐은 늘 1호의 몫이었다. 주말에만 가끔 만나 몰랐던 1호의 평일은 하교 후, 학교 운동장이나 집 앞 편의점에서 놀고 있는 2호를 찾아 집에 와서 가방을 내려두고, 4시 20분에는 4호를, 5시 10분에는 3호를 마중 나가 동생을 챙겨 집에 와 아주버님이 퇴근하시는 6시 30분까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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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남매의 육아에 적극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가장 처음 한 일은 1호의 영어학원 등록과 3, 4호의 하원을 도맡은 일이었다. 어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1호가 안타까웠지만, 어른들 모두 스스로의 일만으로도 버거워 그 고사리 같은 손의 도움을 차마 내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퇴근 후 4호 픽업부터 3호 하원버스 시간까지 맞추려면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야 하고, 하원 후 아이들을 씻기고, 집에 데려다주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고 많은 시간을 요했다. 그리고 그게 힘들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9살부터 그랬다는 1호의 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있다.
늘 어른이 옳지는 않다. 아이들에게도 배울 점이 있고, 아이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아침 등굣길에 1호를 안아주며,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나누면, 고 작은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네- 작은엄마도요!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느끼는 요즘.
우리 모두 잘 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