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수 없는 사람의 여행 2
약속 장소인 브릭레인의 한 모퉁이, 피트pete는 특유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세 명이 참여자의 전부였지만 그는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피트pete에요. 이 거리에 살고 있죠.”
사진 출처 : https://unseentours.org.uk/tour/brick-lane
브릭레인은 뱅크시부터,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이 곳곳에 자신들의 작품을 새겨놓은 거대한 야외 미술관이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18세기 맥주양조장을 개조한 트루먼 부르어리를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깃들기 시작하며 거리 곳곳을 채운 그래피티 작품들, 백야드 마켓 등 런던의 가장 힙한 서브 컬쳐씬으로 주목받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십여년째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는 피트는 오늘의 투어 코스를 안내해 주며 덧붙인다.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들도, 루브르의 모나리자도 들어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처럼, 브릭레인의 위대한 작품들도 이 골목을 걷지 않으면 만날 수 없죠. 오늘 여행은 미로처럼 생긴 옛 공장지대 속에서 거리의 작품들을 발견하는 브랙레인 예술투어에요. 브릭레인은 이 동네가 전에는 벽돌과 타일들을 생산하던 공장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죠. 여행을 안내하게 될 저는 이 거리에서 10년 이상 살아가고 있습니다. 웬만한 욕은 10개 국어로 가능하죠. 저보다 미술을 더 잘 아는 사람은 많겠지만 저보다 더 오래 이 거리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겠죠?”
거리를 걸으며 그는 누구나 궁금하지만 쉽게 묻지 못하는 “왜 거리의 노숙인이 되었는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멘체스터 출신이었던 피트는 1997년에 브라이튼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 서섹스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인 2005년 광고 분야에서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찾았고, 당분간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런던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직에서 만난 상사는 까다로운 폭군이었다고 했다. 매일 면도를 하지 않으면(저는 면도를 싫어합니다) 부랑자처럼 보인다고 폭언을 했고 사소한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상사의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그는 '자발적으로' 직장을 그만두면서 모든 혜택을 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그 이후로 주말이면 브릭 레인 마켓에서 쪼그리고 앉아 거칠게 잠을 자며 일하는 삶을 이어가다가 언씬투어를 만나 브릭레인 거리예술 가이드가 된 것이다.
“브릭레인은 제 집이나 다름없죠.”
그는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스토리와 브릭레인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함께 걷던 앤디가 취미가 뭐냐 물었더니 피트는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당연히 축구죠, 멘체스터 유나이티드여 영원하라”고 답한다. 유쾌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퍼커셔니스트이기도 하고 워낙 예술을 좋아했어요.” 사람을, 무엇보다 예술을 좋아하던 그에게 브릭레인은 거대한 거리의 미술관이나 다름없었다. 브릭레인에서 보내는 그의 삶과 시간, 취향이 만나 언씬 투어의 브릭레인 그리패티 예술 투어가 만들어졌다. 그만의 큐레이션으로 만들어진 코스 곳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는 거리의 학예사가 되어 작품을 설명해주었다. 냄새나는 좁은 골목을 지나 숨은 그림처럼 그래피티를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브릭레인의 역사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한 때 번성했던 공장가였던 브릭레인에서 시작된 성냥공장 소녀들의 저항, 회당이었다가 교회였다가 모스크가 된 브릭레인의 다문화적 역사, 공장지역 노동운동에 기반해 정치적으로 급진파들이 주로 모여들었던 브릭레인의 정치적 흐름, 식민지 시절 이주한 인도사람들이 형성한 커리식당가, 싼 임대료를 찾아 온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로컬 마켓과, 힙한 공간, 거리예술의 씬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낸 예술을 소유하려는 자본의 투자와 젠트리피케이션의 물결 속에 떠밀려 나가고 있는 브릭레인의 예술가들이야기까지..
피트와 함께 걷는 시간은 브릭레인을 통해 런던의 보이지 않는 역사와 문화, 정치와 예술을 압축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두시간여 짧은 여행을 마치고 엔딩 포인트에 도착할 무렵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작품과 이야기들로 브릭레인의 새로운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라면 언씬 투어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시선으로 도시를 보는 새로운 여행이었다. ‘다른런던’을 여행하고 싶다면 언씬 투어에 참여해 보라던 앤디의 조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제사 헤아려진다.
노숙자의 눈으로 런던을 만나는 Unseen Tour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여행, 언씬투어(Unseen Tour) 2010년 런던에서 시작된 사회적 기업이다. 런던의 악명높은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작된 언씬투어는 노숙자들을 골칫거리가 아니라 런던의 거리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거리의 전문가, 자신만의 시선과 이야기로 이전에 발견한 적 없는 런던을 안내 해 주는 워킹 투어 프로그램이다. 언씬투어는 거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노숙자들이 그 거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며 낯선 시선으로 그곳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언씬 투어는 노숙자들에게 유급일자리를 창출할 뿐 아니라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노숙자들이 자신의 존재로 사람을 만나고 교류할 플랫폼이 되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언씬투어의 프로그램은 점차 다양해져 브릭레인 그래피티 투어부터 쇼디치 도시재생구역 여행, 코벤트 가든의 이면을 걷는 여행 등 23개 이상의 프로그램에 2만명 이상의 여행자들이 함께 했다. 2011에는 책임 여행상을, 2018년 트립어드바이저상, 2022년 트래블러스 초이스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런던을 새로운 시선으로 여행하고 있다.
● Unseen Tour : https://unseentours.org.uk 온라인 예약이 가능하고 약 2시간 투어에 참가비는 약 20파운드(18.5파운드 참가비, 1.5파운드 예약비), 참가비의 60%는 가이드에게 지급되며 소요시간은 약 2시간. 무장애 관광으로 설계되어 있고 반려동물 동반도 가능하다. 요일과 시간을 잘 확인해서 여행 일정에 맞게 미리 예약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