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랑 놀자

교회, 친구, 쉼

by jungsin



1

현실 교회는 이상 교회와 달라 정말 온통 규칙과 당위로 점철되어 있다. 몸소 체험한 바 그것들은 대체로 전혀 신학적 깊이를 충분히 충족시켜주는 고민과 철학에 의한 것들이 아니었다. 되려 신학에 대한 오해, 그러니까 복음과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엉뚱한 오해와 곡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사랑하라는 명령 외에 대부분의 당위와 암묵적 규범들은 우리의 본성인 종교성과 죄성, 욕망과 인정 욕구, 명예욕, 또는 유교적 문화나 제의 의식적 문화 같은데서 온다. 몰트만이 말한 것처럼 빙빙 돌고 도는 제의의 반복, 한 치도 변함없는 존재의 자전 같은 것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오는 것은 그곳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나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교회에 찾아가야만 썩 괜찮은 사람이나 목사를 만나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미시적인 미덕을 제외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또는 하나의 교회 그 자체를 보자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하나님이나 인간이 바라는 이상을 충족시켜주지도, 또는 최선이 되어주지도 못한다. 차선 또는 차차선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실은 교회 밖의 세상이 그만큼 엉망인 현실뿐이란 사실의 반증이 되어줄 수 있을 뿐이다. 정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반이 되어 줄 수 있을 뿐이다. 거대 양당의 정치 현실에서 두 당이 돌아가며 반사이익을 얻는 구조처럼 말이다. 우뚝 솟은 교회의 십자가 첨탑은 세상이 차차선인 교회보다 더 최악으로서, 온통 쉼을 얻을 수 없는 곳들뿐이란 의미를 확인시켜 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가장 적나라하고 초라한 현실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교회, 오직 교회가 아니라 그래도 교회, 그나마 교회 말이다.




2

가까운 동생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는 나를 정말 좋아해 주는 동생이다. 나는 바로 어젯밤 보았던 연애 프로그램에 얼마전 새로 등장한 여성 출연자(이른바 메기)의 매력적인 인상에 대한 따끈따끈한 이야깃거리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또한 마침 근래에 당면하고 있는 과제였던 어떤 문제 하나를 이제 막 푼 차였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후련하고 상기된 기분으로 그 방송을 보았고, 그렇게 특별하게 높은 집중력으로 보았던 터여서 그 여성 출연자의 말과 눈빛에 대한 나의 놀라움과 감탄은 다소 증폭된 것일 수 있었다. 그렇게 잠들었고. 나의 달콤한 감상은 다소의 더부룩한 가스처럼 남아있었다.


겨우 불행중 다행의 선상에서 조금은 홀가분한 주말 아침이 왔다. 기운을 차려 해치우듯 푸파푸파 샤워를 했다. 손에 잡히는대로 남방 하나를 집어들고는 단추 채우는 시간마저 아깝다고 느끼며 파박파박 옷을 입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듯 무거운 가방과 함께 삶의 문제들을 이고 지고 메고 가장 가까운 동네 카페에 당도했다. 가져온 책이나 키보드 같은 것들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어제의 메기는 잊고 무엇이 되었든 의욕적으로 좀 해보려던 찰나, 마침 그렇게 그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이야기를 풀어놓기 딱 좋은 사적인 지인. 항구적인 나의 편.


그는 내게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통화의 어느 시점부터는 오직 그에게 그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어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초점은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일에, 또는 미지의 감정의 교류에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이 두 문장 정도가 맺어질 때마다 어떤 말을 했다.


짝짓기 예능이 사람들의 눈높이를 높여 놓았다고. 다 작가의 대본과 피디의 편집에 따가 흘러가는 거라고. 고독 속에 들어가 보라고. 형이 자꾸 큰 카페 공간에 가는 것도 외로움을 잊기 위함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내가 붙잡아 두려 했던 이야기를 데리고 너무 멀리 갔다. 형 나이에는 그런 거 보면 안 된다고. 그럼 현실에서 사람 못 만난다고. 그보다 기도원에 가보라고.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좀 듣고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받아 보라고.


​링링링. 짧은 신호음이 내겐 정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가운 소리였는데. 그는 언제나 나에게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 그 자체인데. 그 아이는 하루종일 관계의 배를 곪다가 이야기의 놀이동산에 들어갈 생각에 신난 어린이의 손목을 낚아채, 자꾸만 자꾸만 미지의 성소로 데려가려고 했다. 어떤 종교성 때문인지, 너무 성령이 충만했는지 그는 나의 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전혀 들어오지 못했다. 고된 동자승의 등에 죽비를 내려치려고만 했다. 도대체 외로움을 해결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3

​최근 조언을 해준답시고 어떤 말을 해주다가 한 어린 동생의 기분을 망쳐버린 일이 생각났다. ‘땡땡아, 너 아무개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아무개가 너보다 몇 살이 많은데 그렇게 말하니. 너 어디 가서 그러면 사람들이 예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예의를 중요시하는 나라인데 한참 형한테 그렇게 말을 해. 그래. 뭐, 우리 사이에서야 괜찮지. 형들이 다 이해해 주니까. 형이 너, 다른 사람들한테 흉보일까봐 가르쳐 주는 거야. 다른데 가서 그런 모습 보이면 못 배웠다는 소리 듣는다 너? …’ 나의 잔소리는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앞에 두고 끝날 줄 모르며 한동안 계속되었다.


2의 동생과 전화를 끊고 이런 저런 상념에 젖은 채 찾은 화장실에서 문득 그날의 일이 생각난 것이었다. 2의 거울에 비추어 돌이켜보니 내가 바른 가르침이라고 생각한 그 언행은 명확히 꼰대질이었다. 물론 내 편에서 나름의 분명한 이유는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삶에는 예절을 가르쳐 줄 인생의 선배나 어른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가 말을 함부로 한 그 형은 그에 비해 신체적으로나 여러모로 한참 더 약했기에 강강약약의 감각도 건드려졌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옳은 말을 틀린 순간에, 틀리게 표현했다. 그럼 틀린 것이었다. 존재의 삶의 정황과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텍스트는 옳은 말 아니라, 성경 구절이라고 해도 꼰대질의 도구로 전락하게 될 뿐일 수 있었는데. 그래서 설교자는 텍스트뿐 아니라 콘텍스트를 명민히 살피고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칼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외쳤는데. 나의 입바른 가르침은 평화로운 겨울밤의 계엄령처럼 난데없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세계, 그러니까 나의 언어 세계에 갇혀 있었다. 제아무리 애초에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한들 이미 의미없었다. 말이 길어지면서 나는 결국, 평소에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바로 그 모습이 돼 있었다.


그는 그냥 아무개 형이 너무 편하고 친근해서 장난을 친 거였을 뿐인데. 나처럼 그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 뿐이었는데. 외로운 그는 전적인 타자에게 어떤 말을 걸고 싶은 것이었는데. 내가 연애 프로그램을 보고 신나서 친한 동생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도원도 신학도 경건생활도 내가 몰라서 그랬을 리가 없었는데. 온통 자기를 몰라주는 타자들로 둘러싸인 삶에서 친구를 만나서는 무례하게 장난을 거는 일만큼 소중한 것이 없을 것이었는데.



4

1은 교회와 나의 관계를 2, 3을 통해 애둘러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