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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이상함의 시작, 책으로 버텨낸 날들

by 어스름빛

말할 수 없던 상실, 닿을 수 없던 거리


지금의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나도 말하지 않았다. 친엄마는 내가 서너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성인이 된 뒤에야, 아빠가 말했다. 엄마가 배가 아프다 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병원에 갔을 땐 이미 위암 말기였다고.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언젠가는 의료사고였을 수도 있다고도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빠마저 이제 세상에 없다.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백지처럼 남았다. 기억이 없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는 없다. 다만 설명할 수 없기에 더 깊게 패인 그 구멍은 나를 갉아먹었다.


지금의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시간은 길었다. 그래서일까?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자랐다. 어쩌면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이유는 낯선 곳으로 이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했다. 그때는 친구들이 텃세를 부려서 한동안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5학년이 되어 읍내로 이사 가기 전까지 내가 살던 곳은 학교에서 너무도 멀었다. 원래 농장이었던 곳을 수련관으로 바뀌게 되면서, 아빠가 수련관의 주방장이 되었다. ‘시골’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으로 이사 갔던 이유이다.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가야 했다. 버스를 타고 20분, 다시 한 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했던 그 산골짝은 어린 내게 너무 멀고 낯설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은 없었다. 구불구불한 언덕 옆 도로만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논들이 나왔다. 논 근처 띄엄띄엄 있는 집들을 지나고 또 지나면 마을 사람들이 ‘이후락 씨 도자기 공장’이라고 부르던 곳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개울이 있었다. 개울을 건너면 세 채뿐인 집들이 있었다.


우리 집은 그중 가장 안쪽,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아 텔레비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푸세식 화장실조차 새로 지어야 했다. 논과 밭, 나무뿐인 풍경은 내 하루처럼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아빠는 수련관 일로 늘 바빴고, 새엄마는 너무 어린 배다른 동생을 돌보느라 내 곁에 없었다. 오빠는 인근에 사는 사촌오빠와 어울려 놀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산과 들을 산책하는 것과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책 속 친구들의 고요한 동행

누군가 나에게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기가 이사했을 때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내게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준 것이 바로 책이었다. 아빠가 오빠를 위해 사준 계몽사 세계문학전집 60권은 그 산골짜기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난 친구들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그 책들 속으로 들어갔다.


AI 그림


책은 놀이터였다. 읽는 순간만큼은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나 『소공녀』의 세라처럼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매일 걸었던 긴 등하굣길 위에서도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 진짜 부모님은 어딘가 살아 계시고,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올지도 몰라’, ‘언젠가는 주디나 세라처럼 나에게도 후원자가 생길 거야.’ 지금 돌아보면 엉뚱한 공상이었을 뿐이지만, 그때는 그런 상상이라도 있어야 견딜 수 있었다.


동화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나처럼 결핍을 안고 있었다.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셨거나, 가난했거나 외로웠다. 진짜 내 엄마는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그때, 책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말하지 않아도 통했다. 그들의 삶에 나를 겹쳐보고, 그들의 모험에 함께 뛰어들었다. 그들이 품은 질문으로 나의 질문을 달래곤 했다. 나의 진정한 친구들은 책 속에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친구들.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또래 친구들과 감정을 나누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문학 속 친구들이 나처럼 ‘버려진 아이’였다면, 현실 속 친구들은 그저 ‘아이’였기 때문이다. 같은 교실에 있어도, 같은 나이를 살아가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대화 대신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세계가 생긴다는 뜻이다.


책이 가르쳐준 무게


십여 년쯤 전, 허수경의 『길 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읽다가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 안에 실린 「우울했던 소녀」라는 글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놀림을 받던 소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책을 읽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뚱뚱한 실존을 드러내라는 소리 같았다고….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천장을 바라보던 마음이, 누군가에게 놀림을 당하는 모습이 바로 문학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길 바랐다. 부모님이 나를 부르면 책을 덮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을 때마다 서글펐다. ‘벗어나고 싶어도 계속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좌절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더 깊이, 더 오래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은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버팀목이었다.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를 거치고, 오래전에 성인이 된 지금도 책으로 돌아간다. 질문이 생길 때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사람에게서 상처받을 때마다…. 마음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면, 책은 불안한 마음을 감싸 주었다.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호롱불처럼 나를 지켜보았다.

AI 그림


책은 내 삶을 바꾸진 못했다. 다만, 견디는 방식은 바꿨다. 그래서 나는 안다. 책을 읽는 사람은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고독을 통과할 수 있다는 걸. 자신이 겪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삶을 깊이 느끼는 마음, 그런 감수성이 책을 읽는 사람 안에 있다.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아. 너의 속도로 가도 돼.”

책은 나를 붙드는 추였다. 그 무게가 나를 무너지지 않게 했다.




이 글은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조용히 써 내려간 첫 문장들이 어떻게 ‘나의 목소리’가 되어갔는지를 이야기합니다.

― 2장. 글쓰기로 찾은 나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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