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동아리와 책
대학에 입학한 뒤 달라지자고 결심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없는 사람처럼 살았으니까, 대학생이 되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자고. 항상 다짐했던 것처럼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자고. 그러나 3월이 되어 막상 학교에 가 보니 오리엔테이션에서 친해진 친구들이 많았다. 이미 늦은 듯했다. 어색함과 서먹서먹함에 그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공강 시간에 학생회관을 서성이다 발길이 멈춘 곳은 책 더미 앞이었다. 수많은 동아리 가판대 중 유독 책이 쌓여 있던 그곳은 IVF(한국기독학생회)였다. 그저 책에 관심이 있었을 뿐인데, 어떻게 언니들에게 이끌려 동아리방까지 가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동아리방에서 만난 언니들은 다정했다. 누군가의 다정함에 한없이 약했던 나는 망설임 없이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곳에서 ‘공동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여섯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는 늘 나를 평가하고 지적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IVF는 달랐다. 있는 그대로의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처음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누구도 나를 평가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들어주었다.
소그룹 리더와의 '원투원' 시간은 각별했다. 선배는 내 옆자리에 앉아 물었다. “이번 주는 어땠어?” 그 질문을 받고 마음의 문을 열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마음속 깊은 구멍들을 꺼내어 보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진정 갈망했던 것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따뜻한 시선과 온기였던 것도 같다. 드디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들켜도 괜찮은 곳을 만났다고 느꼈다.
매주 모여 진행되는 성경 공부는 깊이 있는 독서 활동이었다. 성경을 암기하는 대신, 문학 작품을 해부하듯 분석적으로 접근했다. “왜 이 구절은 이런 맥락에서 기록되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며 텍스트의 표면 아래 숨겨진 의미를 파고들었다. 그들의 방식을 통해 성경이 한 시대의 삶과 역사가 담긴 거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IVP 출판사를 처음 알게 되었지만, 솔직히 출판사의 책은 내게 큰 매력을 주지 못했다. 이미 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같은 논객들의 책을 통해 사회와 정치에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관심은 현실을 직접 비판하는 목소리에 더 기울어 있었다.
대신 수련회에서 만난 강영안 교수의 강의는 오래 남았다. 그분은 “신앙이 삶이고 삶이 신앙”이라고 말했다. 전도를 강조하기보다 삶으로 신앙을 드러내라는 가르침은, 돈을 탐하는 세속적인 신앙인들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던 내게 꼭 필요한 답이었다. 죽음 이후의 구원보다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 역설적이게도, 종교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내가 오히려 더 깊이 머물게 된 이유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의 규율은 점점 무겁게 다가왔다. 2학년이 되기 전, 낯선 캠퍼스에서 노방 전도를 해야 했고, “비기독교인과는 사귀지 말라”, “이성 교제는 4학년 이후에” 같은 규율에 부담을 느꼈다. 따뜻함에 이끌려 들어갔지만, 어느 순간 그 따뜻함이 나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었다.
그 무렵 잡지 《복음과 상황》을 만났다. IVP 책은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달랐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신앙인의 눈으로 비판하는 문장들은 내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종교적 언어와 사회적 언어, 두 세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는 긴장 속에 서게 되었다.
공동체의 온기를 원했지만, 책이 던지는 질문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질문들이 믿음의 세계에 균열을 냈다. 오래도록 안식처였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끝내 지켜야 할 것은 내 목소리였다.
스물네 살까지 IVF에 머물렀다. 그 무렵 《복음과 상황》 독자 모임에 참여하며 더 넓은 질문을 배웠다. 신앙과 사회, 철학과 현실을 오가며 읽는 경험은 공동체 안에서 배운 온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공동체와 책, 따뜻함과 질문 사이에서 오래 머물렀지만, 결국 붙잡은 것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남은 것은 책이 던지는 사유와 생활의 장부,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던 20대의 시간이었다.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온라인에서 만난 모임들을 통해 버텨간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 7장. 휴학과 빚, 글쓰기로 버틴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