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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불안 속에서 읽고 가르치다

by 어스름빛

끝없는 불안, 안녕 없는 계절


겨울은 불안에 시달리는 계절이었다. 다시 교실에 설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으므로. 정규직 교사가 업무 분장을 기다리며 새 학기를 준비할 때, 지원서를 수십 통씩 써 내려갔다.


정규 교사가 전근을 가거나 퇴직하거나, 혹은 신규 교사가 발령받지 못한 자리에 빈자리가 생긴다.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이 기간제 교사의 몫이다. 이 경우가 1년 계약이다. 운이 좋으면 한 해를 채울 수 있었지만, 그 기회는 대개 수많은 경쟁자에게 넘어갔다.


국어 과목은 여타 과목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국어국문학과는 대부분의 대학에 개설되어 있었고, 학부 교직 이수나 교육대학원을 통한 자격증 취득 경로도 다양했다. 그래서 “전 국민의 절반이 국어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까지 나왔다. 수백 통의 지원서를 내고도 면접 연락조차 받지 못하는 일이 흔했다.

1년 계약을 하지 못하면, 그다음은 짧은 계약을 전전해야 했다. 임신이나 출산, 병가 같은 개인 사정으로 공백이 생기면 2~3개월짜리 채용 공고가 드물게 올라왔다. 학기 중간에도 공고가 났고, 2학기에는 한 학기 단위로 뽑는 일이 드물게 있었다. 단기 계약이라도 이어가며 겨우 버텼지만, 늘 “나의 자리가 있을까?”라는 물음을 지우지 못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소속 없음’은 일상이 되었다. 훗날 김민섭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읽으며 공감했던 이유도 기간제 교사였기 때문이다. 계약이 끝나면 곧장 실업자가 되었고, 다시 지원서를 써야 했다. 같은 과정들을 반복하면서, 교사라는 직업은 안정이 아니라 불안을 확인시키는 이름이 되었다. 정규직 교사와 똑같이 수업하고 학생을 가르쳤지만, 계약이 끝나는 순간 교사라는 정체성도 함께 흔들렸다.


새로운 학교로 옮겨 다니며 아이들과 쌓은 관계는 언제나 임시로 머물다 떠나는 흔적에 그쳤다. 소속감을 얻지 못하는 삶은 자존감마저 흔들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얻는 보람이 있었지만, 계약이 끝나면 보람감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나는 교사인가, 교실을 떠돌다 사라지는 대체 인력인가.’ 이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교무실에 앉아 있을 때도 늘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식했다. 같은 일을 하고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동료 교사들 곁에 앉아 있어도 우리 사이에는 지워지지 않는 경계가 있었다. 그래서 늘 허공에 매달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사할 때 “안녕하세요?”라고 묻는다. 흔한 인사말이지만,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안녕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 탈 없이 편안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매해 반복되는 불안과 경쟁 속에서 단 한 번도 안녕하지 못했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안녕하세요?”라고 묻고, 아무렇지 않게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한다. 그 질문이 싫었다. 기간제 교사라는 이름이 붙는 한, 소속 없는 삶의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황 끝, 다시 책으로


불안감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정규직 교사와 비교되는 현실,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긴장은 교실 밖에서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금세 무너질 것 같았다.


알라딘 서재 활동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불안한 날은 책이 읽히지 않았다. 서재에 글을 남기는 일도, 다른 이들의 서평을 읽는 일도 집중할 수 없었다. 책은 곁에 있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은 흩어지고,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그때는 불안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줄,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동호회 활동에 빠져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지역 모임에 나가고, 또래들과 삼삼오오 어울렸다. 비즈 공예를 배우고, 화장품과 비누도 만들어 보았다. 영화 동호회에 속해 시사회에 다니며 무료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평을 제출해야 했는데, 덕분에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 순간만큼은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험은 짧은 위안을 주었다.


곧 공허함이 따라왔다. 공예품은 완성해도 금세 질렸고, 영화는 끝나면 기억에서 사라졌다. 무엇 하나 오래 붙들 수 없었다. 그 활동들은 불안을 잠시 덮어줄 뿐, 깊이에는 닿지 못했다. 결국 다시 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책은 달랐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이어가게 했다. 흩어진 마음을 정리할 여백을 주었다. 책은 흔들리는 나를 붙드는 손길이자, ‘나의 존엄을 지켜주는 멘토’였다. 어느 모임에서도, 어떤 공예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마음의 뿌리가 거기에 있었다.


좌충우돌하며 여러 방향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온 그 시간들은, 나에게 독서가 생존의 방식임을 알려 주었다. 불안정한 자리에 서 있던 나를 끝내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준, 가장 오래된 버팀목이었다.


그 시절에 자주 읽은 책이 신영복 선생님의 <나무야 나무야>였다. 스무 살 무렵에 처음 산 책으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다시 펼쳐 읽을 때마다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철없던 스무 살에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시간이 흘러 사색의 깊이를 더하기보다 세속적인 계산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 책은 조용히 묻곤 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보다는 마음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우직함보다 약삭빠름을 택하고, 현실의 편안함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다시 읽을 때면, 그 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속삭였다. 다시 순수해지라고, 겸허하게 한 걸음을 내딛으라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글 속의 문장들은 빛바래지 않았다. ‘미완은 반성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꾼다’는 말이 다시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 문장들은 여전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무야 나무야>는 내 안의 순수함을 기억하게 했고, 삶이 흔들릴수록 더 단단히 뿌리를 내리라고, 나무처럼 살아보라고 일러주었다.


그 책을 덮으며 알았다. 내가 버텨야 할 이유는 새로운 학교의 계약을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교실에서 찾은 만족, 가르침과 배움


학교 밖에서는 불안에 흔들렸지만, 교실 안에서는 다른 마음이 일었다. 사실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국어 교사를 지망했지만, 나는 기자를 꿈꾸었다. 그러나 중앙일간지 기자가 아니면 생활을 꾸리기 어려웠고, 그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고시에 가까운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길이었다. 결국 기간제 교사가 되었고, 생활비와 학자금 대출을 갚아 나가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시험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교실에 들어서면 달랐다. 행정적인 업무는 즐겁지 않았지만, 국어를 가르치는 일만큼은 즐거웠다. 아이들에게 글을 읽고 이해하고 말하고 쓰게 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교사라는 사실을 긍정할 수 있었다. 불안정한 자리에 서 있었지만,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만족감을 주었다.


교직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지만, 교실에 있을 때만큼은 성심껏 가르치려 애썼다. 용인의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했을 때는 정교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와 “잘 가르치는 방법이 뭐냐”라고 물어온 일도 있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교실이 일에 대한 보람감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계약이 끝나는 순간, 만족감은 다시 불안감에 잠식되었다. 왜 누군가는 안정적인 자리를 얻고, 누군가는 불안정한 자리에 서야 하는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하면서도, 왜 어떤 이름은 인정받고 어떤 이름은 지워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개인적인 성찰을 넘어, 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확장되었다.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개인의 불안이 어떻게 사회적 질문으로 이어졌는지의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 10장. 책으로 배운 정의보다 복잡한 현실10장. 책으로 배운 정의보다 복잡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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