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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pr 17. 2017

타인을 위한 거짓말

어느 재즈 기타리스트가 일부러 자신의 공연 시간을 틀리게 알린 이유?

   '김PD의 인문학 여행' (44)


   나를 중심에 놓기에도 바쁜 세상 속에서 타인을 배려한다는 게 여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은 한 재즈 기타리스트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 하나를 공개할 생각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별 대단한 일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조금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이야기다. 화제의 주인공은 남아공 출신의 기타리스트 제이드(Jade van Vuuren)다.


   그와 인연도 벌써 재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서촌 통의동 골목길에서 조그만 와인바와 까페를 운영하고 있다. 인적도 드물고 상업적인 공간도 아니라서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다. 이런 좁은 골목길 한쪽 구석에 '김PD의 통의동 스토리'라는 이름의 공간을 오픈한 것은 오래 전부터 꿈꿔웠던 버킷리스트 하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였다. 바로 문화와 예술이 숨쉬는 작은 공간을 하나 갖고 싶다는 꿈이었다.


   외국에 나가 생활하다 보면 일상의 작은 공에서 벌어지는 작은 콘서트들을 접할 때가 다. 2,30명 남짓한 작은 규모의 콘서트이지만, 열정을 품은 뮤지션들과 관객들이 호흡을 함께 하면서 대형 콘서트 못지 않은 열기와 즐거움이 있다. 그런 작은 음악회를 벌써 3년 동안 운영하면서 나 역시 좋은 연주자들과 만날 기회가 다. 재즈 기타리스트 제이드는 바로 우리 공간에서 오래 전부터 공연을 해왔던 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다.


   아직은 국내에 플라멩코와 라틴재즈에 대한 인기가 그리 높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공간에서 연주를 하는 제이드나 그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공연하는 쏘냐 씨에게 음악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모두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생계가 넉넉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제이드의 경우에도 낮에는 지금도 영어 강사 일을 하고, 밤에는 재즈 기타를 연주하며 두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


   사실 제이드의 기타 수준은 매우 수준급이다. 큰 키에 어울리는 길고 유연한 손가락 덕분에 현란한 기타 핑거링 주법에도 능숙하다. 늘 공연이 있는 날이면 커다란 기타 케이스를 앞으로 쭉 내밀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헬로 미스터 킴!'하고 인사를 한다. 우리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늘 우리 가게에 들어올 때면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다한다.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늘 인원이 몇이 되던 관객들 몇몇과 함께 와인 한 잔을 나누고 돌아간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것이 제이드가 우리 가게, 우리 공간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에는 공간을 제공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예의가 스며 있다. 비록 얼마가 됐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는 것, 공연이 끝난 뒤 다시 그 큰 기타 케이스를 삐죽 내밀며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느끼는 제이드의 참 모습이다.


   오늘도 나는 제이드와 이번 주에 있을 예정인 공연 준비로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 우연히 제이드가 자신의 SNS 사이트를 통해서 공연 예고를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 오픈한 제이드만의 사이트였다. 당연히 내용도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적혀 있었다. 공연의 내용과 성격은 물론이고 우리 가게에 대한 간단한 정보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 내려가다 한 가지 틀린 정보가 있는 걸 발견했다. 바로 시간이었다. 우리 가게에서 공연은 늘 토요일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한다. 그런데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공연 시간을 틀리게 적은 것이다. 그것도 무려 한 시간 반이나 일찍.


공연 시간을 원래보다 한 시간 반이나 앞당겨서 SNS에 공지한 제이드


   처음엔 그저 '제이드가 피곤해서 잘못 적었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다. 혹시라도 공연 시간 한 시간 반 전에 올 사람들 걱정을 하며 제이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제이드, 공연 시간이 잘못 적혀 있어요. 6시가 아니라 7시 30분에 시작하는데.......

   제이드: 알고 있어요. 일부러 그렇게 적었어요.

   나: 네?


   제이드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하긴 한두 번 같이 한 공연도 아닌데 그가 시간을 틀리게 적을 이유도 없었다. 문득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몇 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알면서 그랬다고? 왜 그랬어요?

   제이드: 제 생각에는 관객들이 좀 일찍 와서 당신 가게에서 뭘좀 시켜 먹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나: 아.......

   제이드: 공연 시간을 7시 30분으로 하면 사람들이 와서 가게에서 주문할 수 있는 시간이 없잖아요. 이왕이면 사람들이 공연 전에 뭘좀 시켜 먹으면 좋잖아요. 제 생각 어때요? ^^


   이럴 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사실 처음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멍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고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자꾸만 뭔가 여러가지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이 교차했다. 사실 작년 촛불집회 이후로 통의동에 있는 우리 가게도 매출이 많이 줄어들었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한두 달 동안은 경찰들이 세워놓은 차벽 때문에 가게에 들어올 수도 없던 적도 있었다. 광화문 일대가 아무래도 복잡해지다 보니 사람들도 서촌 일대에서 발길을 돌리는 일도 많다. 길게 줄을 섰던 가게 앞의 진풍경이 사라진 곳도 많다.


   제이드의 눈에도 아마 그런 서촌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특히 자신이 공연을 하는 공간인 우리 가게에 대한 애틋한 느낌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만의 상상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통하는 법이다. 진심을 다하는 사람의 행동과 말에는 그 진심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믿는다. 그런 일상의 작은 감동과 고마움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나는 늘 믿어왔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 그것은 사치가 아니다. 아주 작은 배려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제이드는 오늘 일부러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걸 감수하면서 우리 가게를 위해서 공연 시간을 한 시간이나 앞당겨 적었다. 마치 자신의 가족이나 되는 것처럼 가게 매상에까지 신경을 써준 그 마음이 나는 고마웠다. 결국 원칙과 합리성, 어느 누구보다 정확한 시간 관념을 갖고 있는 서구인의 생활 방식에 비춰 보면 조금은 낯설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모든 걸 깨고 제이드가 택한 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였다.


   이렇듯 생활 속에서는 아주 작고 소소한 배려들이 늘 존재한다. 건물을 들어갈 때 뒷사람을 위해서 현관문을 잡아주는 것이나, 아이들과 여자들을 위해서 자리를 양보하는 일, 때로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노선을 바꾸려는 옆차를 위해서 잠시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것들이 바로 그런 사소한 생활 속의 배려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생활에서는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귀국한 사람들이 자주 겪는 어려움 중 대부분들은 바로 그런 일상의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한국에선 뒷사람을 위해서 현관문을 잡아주면 도어맨이 되길 감수해야 한다'고 자조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삶이 풍요로워지는 게 반드시 돈이 많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깃든 타인에 대한 배려, 여유롭고 풍요로운 정신적 삶이 아닐까.


한국에선 뒷사람을 위해서 현관문을 잡아주면 도어맨이 되길 감수해야 합니다.

   나는 제이드 덕분에 오늘 아주 작지만 잔잔한 감동을 하나 선물 받았다. 그 선물 덕분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의 작은 친절과 배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렇듯 가슴이 따듯해지는 고마움과 행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엄격한 시간만이 아니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원칙만이 아니라 그 원칙을 풍요롭게 하는 '인간'이어야 함을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고급스런 삶이란 생활의 텃밭 속에서 피어나는 이름없는 작은 꽃들이 아닐까. 크고 많고 거창한 구호들보다 어쩌면 그런 작은 일상에서의 정을 나누는 문화가 우리 삶 곳곳에 다시 피어나길 희망한다.


  "제이드, 당신 친구들이 한 시간 반이나 공연장에 일찍 왔다는 걸 알면 다들 좀 놀라긴 할 것 같은데...그래도 괜찮겠어요? 다들 좀 황당하겠죠...그래도 뭐 당신 친구들이라면 다 이해할 거라 믿어요. 아주 재밌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이벤트가 되겠네요. 이번 공연도 우리 멋지게 잘 해봅시다. 제이드, 화이팅!"


  추신: 아마도 한글을 모르는 제이드는 내가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혹시라도 제이드 친구 분들 중에 이 글을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제이드에게 제가 많이 고마워하더라고 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 작가)






   제이드와 소냐의 '플라멩코 & 라틴재즈의 밤' 공연은 4월 22일 토요일, 저녁 6시가 아니라 7시 30분에 시작될 예정입니다. 그것도 모른 채 한 시간 반이나 일찍 서촌,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 오게 될 제이드의 외국인 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신 분들은 6시에 와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벌써부터 그들의 당황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네요.




   현재 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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