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인생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결코 깔끔하게 매듭지어지지 않고 생애 전반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친다. -192p, 문을 열며
거듭되는 고립과 상실을 겪으면서 거의 떠밀리듯 읽고 쓰는 삶으로 다시 한번 고립되어 상실을 되새기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쓸 것인지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는 동안 머나먼 과거로부터 늘 함께해온 듯한 가치와 방향들은 마치 나침반처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렇게 도달한 중앙역이 어쩌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와는 스무 살부터 삼 년 동안 거의 모든 주요 이벤트를 함께 했고, 내가 살기 위해 일시정지를 했던 동안에도 각자의 사정에 의해 꼭 붙어있었다.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미묘하고 날카로운 언어들마저 경험으로, 육감으로, 이성으로 마찰없이 교환할 수 있는 사람. 동지애에 우정까지 보태도 반의 반도 설명할 수 없는 친구였지만 각자의 삶의 궤적에서 너무도 느슨하게 스치기만 했고 (그럼에도 드문드문 많은 양의 정보를 업데이트했고) 다시 7년만에 재회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읽고 써 온 이야기는 아주 다르지만 나는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들켰고, 그간 존경해 온 리베카 솔닛이 아닌 바로 신성아가 내 친구라는 사실에 형언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경험적 아픔에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넘어 차갑게 파고든 심연까지 이렇게 쓸 수 있던 '열정과 지성'에 감복한 것은 물론이고 오늘 갑자기 좋아하게 된 작가라 해도 충분히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말끔함'.
저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생략할 수 없는 주제와 맥락의 책이지만 그녀의 주장에 단 하나의 반대를 하자면, 이보다 더 말끔할 수 있는 문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련한 소설가나 하품나오는 이론서 작가는 물론이고 논픽션의 상아탑이라고 할 수 있는 윈덤캠벨문학상의 수상작가들도 이렇게 보편에 가까운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경이롭다.
이토록 순정한 사랑의 표현이 또 있을까. 당신이 나를 바라봤으면 좋겠고, 나도 당신을 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요구는 값비싼 선물도, 달콤한 언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50p, 타고난다는 오해
노동이라고 하자면 이 일은 착취의 강도가 너무 심하고, 노동자의 소외는 정점에 이른다. 이보다 악질적인 노동조건도 없을 것이다. -76p, 돈 버는 여성
아무도 나를 두고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돈 버느라 많이 바빠'라든가 '엄마에게 중요한 시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자'라고 아이에게 변호해주지 않았다. -86p, 돈 버는 여성
그들은 돌봄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끝내 모른다. 이 키치적 돌봄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라는 키치의 특성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100p, 가족 내 정치
보편복지를 포기한 국가의 무신경한 정책 집행은 이렇게 여성을 편 가른다. 돌봄이 얼마나 힘든지 구구절절 증명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누가 더 고생인지 입증하려고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나는 돌봄지옥을 체감했다. -106, 가족 내 정치
고통을 받는 이가 몇 살인지, 경제활동을 하는지, 우리 사회에 이바지할 특별한 능력은 있는지 등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돌봄을 받을 가치를 주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돌보는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결국 모두가 외로워진다.
-131p, 눈에 보이는 구원
그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많은 상처가 이 아이들의 마음에 남게 될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별들이 일제히 빛을 잃는 광경을 지켜만 봐야 하는 심정이다.
-159p, 의학의 태도
근대적 이분법이 완벽히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철학이 설 자리가 없고, 정치가 작동할 기회가 없다.
돌봄, 의료공백, 고가 신약 급여 등재, 건강보험 재정위기, 존엄사, 연명의료, 호스피스 등 수많은 난제가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187p, 의학의 태도
정희진 선생님의 '왜'가 과찬이 아님을 알게 된 이상, 그보다 더 구구절절한 예찬은 불필요한 것 같다. 더불어 이 책이 앳 시리즈라는 영예를 이어받은 것도, 출판사에서 '저자' 덕분이라고 말해준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우리의 사랑과 의리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