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혜인가 그 사랑 크셔라
-찬송가 143장 중에서
다시 주일이다. 오늘도 무언가에 홀린 듯 교회를 갔다. 남편은 모태신앙이지만 나는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고 세례를 받았다. 찬송가의 저 ‘벌레’ 같은 말이 늘 거슬렸다. 만물의 영장이 벌레 같다니, 처음에는 번역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었다. 죄인이라면 납득할만할 것을, 왜 하필이면 '벌레 같은' 표현을 했을까 생각하다 보니 설교는 끝나 있었다. 마흔이 넘어보니 좋은 것이 하나 없다. 하루 두 끼를 먹는데도 기초대사량이 떨어져 팔뚝, 허리둘레에는 나잇살이 잡히고 머리카락과 피부는 푸석푸석해져 에센스를 퍼붓고 있다. 할머니들이 잘 풀리지 않게 파마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노안이 시작되었는지 스치는 바람에도 눈물이 나고, 날렵하던 턱은 중력에 따라 쳐지기 시작했다. 스킨십도 귀찮고 성적 호기심은 사라진 지 오래다. 누가 중년이 되면 품위 있어진다고 했던가. 엄청난 노화의 비밀을 은폐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기미, 탈모를 거스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내 어릴 적 꿈은 마흔이 되는 것이었다. 영원할 줄로 알았던 삼십 대에도 하루빨리 마흔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말이다. 2019년 세상을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다. 팬데믹이 선포되면서 마이너리티가 주류로 부상했다. 17년을 함께 한 우리 부부에게도 권태기가 온 것일까? 어느 날 남편이 폭탄선언을 했다. 자녀도 없고 2세 계획도 없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잠시 떨어져 지내자고 말이다. 한국에서 코로나 확진자수가 최고점을 찍던 날, 그는 조용히 짐을 싸더니 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 넌 처음부터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아메리칸이었지.'
이 상황이 꿈이라면 좋으련만 며칠이 지나도 침대 한편은 허전했고 가까운 미래조차 불투명하다. 우울할 때엔 습관처럼 유튜브에 접속해 채널 영상을 몰아 몇 시간씩 시청한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댓글로 소통하면 위안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3만 명 구독자를 거느린 <초. 식. 남. TV>는 28살 박사 연구원이 운영하는 채널이다. 마술사 출신이기도 한 그는 이번 생에 졸업논문은 물 건너갔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엉뚱함이 좋아 팬심으로 댓글을 남겼는데 상냥하고 지적인 모습에 매료되어 열혈 구독자가 되었다. 채널명은 '초파리와 식충식물 키우는 남자'의 줄임말로 랩실 일상을 브이로그로 보여준다. 가끔 초파리 돌연변이를 만드는 라이브도 했는데, 초식남이 워낙 현실감각이 없어 보여 연민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드는 나와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팬이란 그냥 좋아서 하는 것 아니던가! 우린 서로의 머릿속에 몇 번을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대화가 잘 통했다. 그가 평소에는 눈이 작아지는 두꺼운 안경을 쓰지만 방송을 촬영할 때에는 렌즈를 착용한다는 비밀도 알고, 게임을 하며 GPU 발열을 이용해 유정란을 부화시켜 몇 달 동안 병아리를 사랑으로 키워 장례식까지 치렀다는 에피소드는 이미 줄줄이 꿰고 있었다. 마침 3주년이라 nft를 만들어 팬심으로 헌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 나의 지루한 삶에 사건이 생기고야 말았다. 초식남 TV 3주년 기념으로 냉동 초파리 천 마리를 선물로 주는 이벤트를 한단다. 우주선에 인간보다 많이 탑승한 경이로운 생명체, 향기로운 과일을 먹고사는 ‘노랑초파리 (drosophila melanogaster)’.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몸통은 엠버 같고 반짝이는 눈은 루비 같았다. 딱히 쓸모는 없겠지만 가까이 두고 관찰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덜컥 당첨이 된 것이다. 생물이라 택배가 안돼 초식남이 직접 들고 와 전해준다고 한다. 성공한 덕후가 되는가 싶었는데 나는 벌레는 물론이고 조류, 포유류 등 동물을 두려워한다. -196 (77K) 도의 액체 질소로 냉동했으니 깨어나 펄펄 날아다니지는 않겠지? 과학도의 꿈을 접고 공대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생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초식남과 만나기로 한 날은 추석 연휴 전 날이었다. 마침 마당에는 호박꽃이 주렁주렁 열려 식사대접을 하기로 했다. 일 년 중 이때에만 먹을 수 있는 호박꽃 튀김과 호박꽃 만두를 정성스레 준비했다. 오후 5시 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지베르니님, 당첨 축하드려요!”
초식남이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지요.”
“곧 추석인데 가족분들은 다 어디 가셨나요?”
“남편은 일이 있어 외출했고 아이는 없습니다.”
“저도 여자 친구가 있는데 잠시 놔두고 왔습니다.”
“아... 네. (안 물어봤는데...)”
방송에서는 말을 곧잘 하더니 낯을 가리는 모양이다. 무안해할까 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벤트 신청자가 별로 없었나 봐요. 살면서 이런 거 당첨된 적이 없는데...”
“아닙니다. 30:1의 경쟁률이었어요. 전산학과 룸메이트가 프로그램을 돌려 공정하게 추첨했습니다. 라이브로 추첨 영상 올려두었으니 한 번 보세요!”
“와! 정말요? 그렇다면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앞으로도 이런 특별한 선물 받으실 기회 없을 겁니다. 실례지만 본명은 어떻게 되시나요? ”
“지베르니가 본명입니다. 모네를 좋아하던 어머니 덕분에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됐네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아… 그러셨군요.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세요.”
“아닙니다. 늘 듣는 말인데요. 그런데 왜 초파리로 연구하시는 거예요? 작아도 너무 작잖아요...”
“저는 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쓰임이 있어 존재하지요. 초파리를 연구해서 인간의 불치병을 치료한다든가, 사람 대신 우주공간에 보내기도 합니다. 작지만 막중한 책임을 지고 말이지요.”
“크리스천이신가 봐요. 불치병을 치료하려면 의대를 갈 수도 있는데 왜 생명과학을 택한 거예요?”
“의학이 지속되려면 기초과학이 중요한데 의사가 되겠다고 외면하면 안 되니까요.”
“그럼 방송은 왜 시작하셨나요? 연구에 매진해도 논문 쓸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 싶어서요.”
긴장해서 평소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초면에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만 돌직구를 날려 버렸다.
“취조하듯 물어서 미안해요. 내 젊은 시절 같아 채널을 보면 몰입했거든요. 꿈을 이뤄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그런데 인기에 연연해서 학문을 포기한다니 화가 나고 슬펐어요.”
“좋아하는 것에 인생을 거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인가요?”
“인생을 살아보니 영원할 것 같은 관계도 변하더군요. 다 생존을 위한 본능에 불과할 뿐이죠.”
“생명과학도로서 한 말씀드리자면 본능조차도 신이 그려놓은 위대한 설계도가 아닐까요? 유전자를 보전하려고 이기적으로 번식하는 것이 어떻게 하찮은 일이죠?”
“제가 자녀가 없어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아이를 낳으면서 인류에 대한 책임감을 떠올리지 않아요. 동물적인 본능이 위대하게 추앙될 수는 없어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이라면 모를까요.”
“잘 알겠습니다. 좋은 인연으로 처음 만났는데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초파리에 대해 궁금한 점 있으시면 쪽지 주세요. 변함없이 초식남 채널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갱년기라 예민해져서 자리를 망쳤네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호박꽃 만두하고 튀김 챙겨드릴 테니 여자 친구분과 같이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편안한 연휴 보내세요!”
그렇게 한 시간도 안되어 초식남과 첫 만남이 허무하게 끝났다. 선물로 주고 간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개봉하니 한 손에 잡히는 작은 바이얼 (vial)에 든 초파리들이 보인다. 천 마리라는데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컬러가 황홀하게 생생하였다.
'냉동 질소로 얼렸으니까 잠자는 거야, 영원히 깨어나지는 않는 거다.'
불안한지 주문을 외우면서 위아래로 몇 번 흔들어 뚜껑을 열고 A4 종이에 쏟았다. 얼어붙은 초파리들이 참깨처럼 알알이 흘러내린다. 과일을 먹다가 급습당했는지 새콤달콤한 향이 난다. 육안으로 보아도 빨간 눈에 투명한 몸통, 방금 흔들어서 떨어져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날개도 있다. 얼어붙는 순간 추웠는지 다리를 웅크린 녀석들도 있다. 꽁무니가 검은 수컷과 배가 통통한 암컷이 섞여있다. 설마 짝을 맞춰서 넣지는 않았겠지. 황금연휴라 할 일도 없고, 혼자 핀셋으로 초파리나 세어보기로 했다. 초저녁에 시작했는데 새벽을 훌쩍 넘겨서야 셈을 마쳤다. 총 1004 마리다. 실수인지 보너스인지 네 마리를 더 담아주었군. 줄줄이 세워 놓으니 무슨 군대 같았다. 밀려드는 뿌듯함에 피노누아 와인을 한 병 꺼내서 다 마시고 잠이 들었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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