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사라지는 것일까
어릴 적부터 나는 매사에 논리적으로 따지다가 매를 벌기 일쑤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아동학대에 준하는 체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형제들은 말리기는커녕 못 본 척 침묵했다. 세월은 흘러 어머니도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고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아침부터 소화가 안된다며 호텔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와라, 백화점에서 호박죽을 사 오라 호출하셨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친정으로 가니 아버지가 엄마가 등을 두드리고 계셨다. "퉁퉁" 소리가 울리면서 둔탁한 것이 복강 내 물이 찬 듯싶었다. 새벽이 되자 당신께서 119를 불러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엄마 체구에 비해 한참은 큰 겉옷을 벗겨보니 배가 산처럼 부풀어 있다. 3리터가 넘게 복수를 뽑았는데도 계속 복수가 차고 있었다. 주치의가 말하길 간경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란다. 엄마는 알고 계셨던 것일까. '팔순 잔치를 앞두셨고 백신도 4차까지 맞으셨는데 별 일이 있겠어?'라는 안일하게 입원 수속을 진행하였다. 아나필락시스로 백신 미접종자인 나는 보호자로 들어갈 수 없고, 동생은 일하느라 바빠 오지 못했다. 전업주부인 언니는 경쟁률 3:1에 불과한 직업학교에 입학했다며 하루 13만 원짜리 간병인을 쓰자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효녀 코스프레를 하더니 참 이기적이다. 상태가 호전되는가 싶었는데 입원 2주가 넘어가면서 간이식 수술을 놓고 온 가족이 논쟁을 벌이던 무렵, 엄마는 황망하게 임종을 맞이하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몇 달 동안은 꿈을 꾸지 않았다. 뇌가 고장 났는지 식욕은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는 기분을 알까.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 생각에 창밖을 하루종일 멍하게 바라봤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처음 꿈을 꾸었다.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떴다. 기분이 저기압일 때에는 냉동실에 넣어 둔 나가사키 카스텔라와 에스프레소가 최고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산은 꺼리지만 달걀 한 판이 들어간 노르스름하고 묵직한 카스텔라는 먹다가 피폭되어도 좋을 만큼 녹진하고 중독적이다. 당분과 카페인으로 뇌세포를 깨우면서 초파리 생각에 서재로 갔다. 간밤에 시큼한 냄새가 좀 가셨을까? 쌍쌍이 줄을 맞춰서 세워둔 터라 한눈에 파악이 쉬웠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따로 모아둔 네 마리가 없어졌다. 작고 가벼워 문을 여닫는 바람에 날아갔나 싶어 바닥을 살펴봤지만 대리석 바닥 위에는 먼지 하나 없다. 냉동한 초파리가 어디 갔지? 취중에 잘못 세었나? 와인은 작업을 다 끝내고 마셨는데 그럴 리 없다. 초식남에게 물어볼까? 일단 연휴이니 습기 찬 냉동 초파리를 자연 건조하면서 침착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올해도 추석 연휴는 근무의 연장이었다. 스타트업에서 아쉬운 건 대표뿐이니 365 일 24시간 항시 대기다. 북미나 유럽 쪽 프로젝트는 시차 때문에 자정이 가까워서야 화상으로 회의가 진행된다. 편한 파자마를 입어도 상의는 차려입고 있어야 한다. 집 나간 지 여섯 달만에 남편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 나파밸리에서 포도를 수확하느라 얼굴이 그을리고 방제를 하느라 바빴단다. 코로나로 인간의 삶이 퇴행할 수도 있구나 얼핏 생각이 든다. ‘소비뇽 블랑 (sauvignon blanc)’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저 남자, 오늘따라 낯설어 보이는 저 남자와의 결혼은 사실 정략결혼이나 다름없었다. 난 서른을 넘기기 전에 결혼을 해야 했기에 급한 마음에 통장을 활짝 보여주면서 내가 프러포즈를 했다.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기고 찰랑거리는 금발에 쌍꺼풀까지... DNA로만 보면 밑지는 거래는 아니었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재미가 없었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식상한 말로 통화를 종료했다. 다음에는 더 설레는 소식을 전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초파리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번 애매했던 마무리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고 우울해 그냥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3주년 이벤트 당첨되었던 지베르니입니다. 가족들과 연휴는 잘 보냈나요?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연락드려요. 혹시 초파리를 몇 마리 담아 주셨는지 기억하는지요? 냉동했다가 살아나기도 하나요? 분명히 한 마리씩 1004 마리를 100열 종대로 늘어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다음 날 보니 네 마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안녕하세요. 초파리는 평균 무게로 달아 드렸기에 크기에 따라 개체수의 오차가 있습니다. 급속 냉동했다가 생명체가 살아나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보고된 적은 있는데, 아직 제가 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만일 살아났다면 본능적으로 짝짓기를 할 것이고 이틀 뒤 알을 낳습니다. 실온에서 2주 후 성충이 됩니다. 한 마리 한 마리 터치하며 관찰하셨다니 드디어 초파리와 사랑에 빠지셨군요! 베르니 님이 만들어 주신 호박꽃 튀김과 꽃만두 덕분에 여자 친구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감사드려요!”
초식남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벌레를 풀었으니 세스코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가, 초파리는 해충이 아니니까 그만두기로 했다. 과일을 방치해 두면 몇 킬로 떨어진 거리에서도 날아드는 녀석들이다. 다음 2주가 고비일 텐데 길어야 두 달을 사는 개체들이다. 영면에 든 초파리는 레진에 넣어 박제된 곤충 보석을 만들어야겠다. 팬으로서 초식남에게 감사의 뜻으로 팔찌를 만들어 조공이나 할 수 있으면 영광이겠다고 생각했다. 회사 일로 바쁘게 정신없이 2주가 지나고 10월 중순이 되었다. 집안에 초파리가 들끓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신기한 일이 생겼는데 초파리 네 마리가 없어졌던 빈자리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생겼다. 자세히 보니 빨갛고 투명하고 단단한 원석 같았다. 조심스럽게 담아 감정을 의뢰하러 동네 보석상에 들렀다. 사장님은 조명 아래서 이리저리 한참을 보았다. 그리고 특수 기계가 있는 안쪽 룸까지 들락날락하더니 보석상 주인이 물었다.
"이것들 어디에서 구하셨어요?"
"실험실에서 만들었는데 궁금해서 가져왔어요."
"루비예요. 0.1 캐럿이고 흠집과 불순물이 전혀 없어요. 스피넬이나 레드 사파이어인 줄 알았는데 분광 분석을 해보니 정말 루비네요. 인공인데 어쩌면 색이 쨍하게 잘 나왔는지 레이저를 쏠 정도로 순정에 가깝네요. 혹시 파실 생각 있으시면 좋은 가격으로 드릴 수 있는데."
"아니요. 아직은 실험 중이라 더 많이 나오면 팔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정 비용을 지불하고 감정서를 챙겨서 루비 네 조각을 담아 보석상을 나왔다. 루비가 왜 거기서 나와? 우리 집에서 초파리에 접근한 사람은 나 말고 없는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지 않았으면 루비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초파리를 가져왔는데 네 마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2주 후 루비가 되었다면 누가 믿을까. 초파리는 다리도 있고 날개도 있네! 살아났다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니 용의자로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수상한 녀석들이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일단 진정하고 초식남에게 연락이나 하자.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하지 않을는지 걱정이 앞섰다.
"MOK 연구원님, 오랜만입니다. 논문 쓰느라 바쁠 텐데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생겨서 연락드려요. 지난 2주간 집안이 초파리 소굴이 될까 봐 마음을 졸였습니다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없어진 줄 알았던 초파리가 놓여있던 자리에 2-3mm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반짝이고 투명한 것이 초파리 눈 색깔하고 같아요. 혹시 선물로 주신 초파리들이 돌연변이인가요?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베르니 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사진과 메일 확인했습니다. 정말 신기하네요! 천 마리는 그대로인데 사라졌던 네 마리가 2주 만에 반짝이는 무언가로 나타났고요. 제가 학부시절부터 10년 동안 초파리를 돌보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제가 드린 초파리는 돌연변이가 아닌 대전에서 자생하는 자연산입니다. 사진으로 얼핏 보니 루비처럼 보이는데요! 베르니 님이 마법을 부린 것일까요? 이거 마술사로 체면이 말이 아닌데요, 도대체 무엇을 하신 건가요? 팬이 아니라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MOK 올림"
팩트를 이야기했는데 픽션으로 받다니 과연 초식남은 멋진 구석이 있다. MOK은 본업은 과학자이지만 부캐는 아마추어 마술사이기도 하다. 미친 사람 취급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를 그대로 믿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인프제 (INFJ)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 마땅히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조용히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하며 한 보름 정도 잠수를 타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11월이 되자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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