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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Oct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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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꽃망울이 기다려지는 2월의 월요일 오전 11시, 초식남이 새 아지트로 방문했다. 아침부터 준비하다가 초인종이 울리고 문을 열었다. 짙은 푸른색 모직코트에 체크무늬 목도리를 둘렀다. 초식남은 파란색을 좋아한다. 실험실에서 되찾은 루비 256개를 주머니에 넣고 왔는지 짤랑짤랑 흔들고는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결혼하고 생활이 편했는지 살이 좀 쪘고 표정이 밝다.


“오랜만이에요! 여자 친구하고 같이 올 줄 알았는데. 혼자 왔어요?”

“직장인이라 돈 벌러 출근했습니다.”

“아.. 추운데 일단 들어가시죠."


 우리 집 거실에는 빨간색과 흰색의 대비로 눈길을 끌었다. 임시거처라 가정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꾸미고 싶지 않았다. 초파리의 빨간 눈과 흰 눈을 기념해서 특별히 맞춘 인테리어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내놓았다. 첫 코스는 입맛을 돋워줄 식전주 플라이 마르가리타 (Fly Margarita)이다. 보드카를 베이스로 라임을 믹스해 프레시한 칵테일을 만들었다. 원래 쓰이는 굵은소금 대신에 초파리를 닮은 달달한 과자를 만들어 잔 가장자리에 빙 둘렀다. 한 땀 한 땀 꿀을 바르고 붙이는데 좀 힘들었다.  



“와! 진짜 초파리는 아니죠?”

“참깨와 차조로 초파리 형태를 만들어 봤어요. 식용색소로 염색해서 드셔도 안전합니다.”

“정성이 들어가서 먹기가 아까운걸요!”

“부담 없이 드세요. 크리스피 하면서 간이 배어서 괜찮습니다. 연구원님 이전 영상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초파리의 세계에도 동성애가 있다!"


 우리 둘은 동시에 입을 모아 외쳤다. 이상하게 초식남은 처음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맞아요. 저는 놀랐답니다. 환경적인 요인인 줄 알았는데 유전적인 원인도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실제에서는 관찰하기 희귀한 케이스인데 논문에서 보셨군요."

"관심이 있는 주제라 관련 논문은 모두 찾아봤어요."


 그는 호기심 어린 미소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난생처음 접하는 이벤트라 퍽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두 번째 코스인 과일 야채가 어우러진 샐러드 에덴동산 (Garden of Eden)을 내어왔다.


"컬러 배치가 예술인데요! 어떻게 초파리가 좋아하는 과일들만 고르셨어요.”

"초파리의 시각에 맞춰 적외선 카메라 모드로 보면서 배치했어요. 가시광선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던데요?"

"참 신기하죠. 곤충들만 볼 수 있는 엄청난 세상이 있다니까요."

"이 세상은 여러 차원이 레이어로 겹쳐진 곳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조물주의 디테일과 그 위대함에 인간은 배울수록 한없이 작아질 뿐이죠."


 초식남은 배가 고팠는지 과일 조각, 잎사귀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세 번째 요리는 레드와 화이트가 어우러진 새콤달콤 토마토 크림수프 '스파이어럴 어택 (Spiral Attack)'이다. 어지러운 소용돌이 위에 흩뿌려진 초파리 크루통 (Crouton)이 포인트이다.


“와~이런 상상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죠? 논문 쓸 때에도 이런 감동이 없었는데, 저 눈물 날 것 같아요.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인데 과분한 선물을 받았네요.”

“정말이요? 미리 알려주셨으면 케이크라도 준비했을 텐데 아쉽네요.”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생일상을 받았습니다. 미슐랭 스타인걸요."


 메인 요리는 버섯이다. 꽃처럼 생긴 징그러운 대형 식충식물 라플레시아를 모티프로 해서 스테이크에 가까운 질감을 살렸다. 언뜻 살라미처럼 보이지만 네 가지 버섯을 혼합해서 알록달록한 육질을 만들었다. 요리 제목은 '비바 라 라플레시아 (Viva la Rafflesia)'.


“어 이거 햄인가요? 혹시 콩고기예요?”

“양송이, 표고, 목이, 팽이버섯을 섞어서 갈아 소시지를 만들어 봤습니다. 제가 육식을 하지 않아서 버섯으로 준비했어요. 연구원님 입에 잘 맞나요?”

“굉장한데요! 지금껏 살면서 먹은 고기 중에서 제일 맛있습니다. 향이 기가 막힌데요!”

“포도나무 청크로 훈제를 해봤어요. 컨템퍼러리 퀴진의 한 기법인데 고기처럼 감쪽같죠?”

“요리에도 이렇게 조예가 깊으신 줄 몰랐습니다. 남편분은 좋으시겠어요.”

“항상 이렇게 차려먹는 건 아니에요. 특별한 날에만 제가 요리를 합니다. 양이 너무 적지는 않았어요?”

“전혀요! 매일 먹는 식사와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뭐니 뭐니 해도 요리의 피날레는 디저트이다. 초파리에서 얻은 루비를 기념하며 만든 오미자 푸딩에 반짝반짝 얇은 캐러멜층을 만들고 위에 금가루를 뿌렸다. 제목은 '루비 뷔릴레 (Ruby brûlée)'로 지었다.


“세상에! 럭셔리한 디저트인데요! 여러 가지 맛의 조화가 오묘해요.”

“오미자라 다섯 가지 맛이 골고루 들었어요. 이렇게 티스푼으로 두드려서 캐러멜 코팅을 깨고 드시면 됩니다. 원래는 크림이 든 프랑스식 디저트인데 제가 좋아하는 맛이 쌉쌀한 맛이라 식재료를 검색하다가 전통 화채에 젤라틴을 넣고 젤리로 만들었습니다. 금가루가 중금속 배출에 도움을 준다니 깨끗하게 다 드세요.”

"실험실에서 종종 한천으로 겔 (gel)을 만들어 사용하는데 요리하고 비슷한 점이 많은데요!"


 디저트의 오색찬란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MOK은 티스푼을 계속 입에 물고 있었다. 철부지인 줄 알았는데 만든 이의 정성을 헤아려주다니 기특하다. 이제 준비한 코스는 다 끝났고 무얼 하지? 그렇지, 냉각해 둔 죽은 흰 눈 초파리를 보여주려고 작은 액화질소 탱크를 꺼내왔다. 뚜껑을 조심스레 열고 초파리 시체들을 페트리 디쉬에 쏟아 놓았다. 냉기가 확 올라오면서 반짝이는 결정들이 보인다. 온도차가 있어 습기가 맺혀서 그런가? 잘 보려면 김이 한 숨 날아가기를 기다려야겠다.


“성에가 껴서 잘 보이지가 않네요. 해동을 기다리는 동안 QT 하면서 차 한 잔 할까요?”

"네 좋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신기한데요? 오늘 베르니 님 댁에 초대받아 함께 식사한 상황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모든 손님들을 최고로 대하라는 말씀도 있으니 오늘 MOK 연구원님이 제게 천사이자 귀인이네요."

"이 모든 요리 준비해 주신 정성과 시간 감사합니다."


 작은 공 모양으로 뜨거운 물을 부으면 꽃이 송이송이 피어 나오는 국화차를 준비했다. 중국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만 한 알씩 개봉한다. 큰 꽃 속에 작은 꽃이 숨어 있다. 반 시간 정도 말씀을 나누고 돌아와서 접시를 살펴보았다. 습기는 날아가고 하얀 눈 초파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투명하고 반짝이는 알갱이들이 보인다. 이게 뭐지?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니 단단하고 견고한, MOK이 바라던 그것이 분명했다. 결혼반지에 박혀 있는, 초식남이 원하던 바로 다이아몬드다. 마침내 MOK의 가설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기쁨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참 동안 괴성을 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위대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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