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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Oct 28. 2020

8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하라

FlyRoom 버전 0.1 스크린샷


“어떻게 된 일이죠?”

“세상에... 저도 모르겠어요.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죠?”

“베르니 님 진짜 마법사 아니세요? 루비를 만들어낸 것도 놀라운데 다이아몬드까지요.”

“이따가 보석상에 들러 확인하기로 하고 잠시만 상황을 좀 정리해봅시다.”

"냉동을 하는 과정에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실험실에서 수 없이 냉동을 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거든요."

"요리할 때 액화질소를 즐겨 사용해 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보통 실험실에서 초파리가 죽으면 어떻게 처리하죠?"

"마취를 했는데 깨어나지 못하거나 수명이 다해 죽으면 에탄올에 담가 버립니다. 파리가 잔뜩 쌓여있어 파리지옥 (fly hell)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데 시체를 한 곳에 모아서 버리기 위함이지 작은 초파리가 사라졌다가 바닥이나 캐비닛 구석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일도 허다합니다."

"그렇군요. 혹시 돌연변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방사능이나 화학적 처리를 한 것이 영향이 있을까요?"

"전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사례가 있었다면 벌써 학계에 보고가 되었겠지요."

"그렇다면 연구원님 말씀대로 제 주변의 무언가가 변수로 작용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요."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남들과 다른 점이라. 죽어가는 식물도 살려 웬만한 화분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다. 키우기 어렵다는 식물도 우리 집에 입양되면 무럭무럭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지. 새로 옮긴 아지트와 이전에 살던 집의 공통점으로 무엇이 있나? 공간도 가구도 바뀌었지만 랩탑과 주머니가 달린 식충식물 하나를 데려왔다. 컴퓨터는 클라우드와 연결되어 프로그래밍을 하고 벌레잡이 통풀은 책상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네펜데스(Nepenthes ventrata)라는 저 녀석은 호기심에 관상용으로 초식남을 따라 키우기 시작했다.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기 쉽지 않아 초식남조차도 몇 번이나 키우기를 실패한 식물이라 빈 집에 방치해두기 미안해 아지트로 데리고 왔다. 얼핏 보면 연두색 플라스틱같이 생겼는데 눈에 띄게 자라지는 않고 직사광선을 받으면 살아있음을 상기시키듯 붉은 기운이 올라온다. 나름 비법이라면 산성토양에서 잘 자란다기에 아침마다 아메리카노를 한 스푼씩 나눠 마시고 있다. 다만 초본이 아닌 넝쿨이라 크기가 작을 때에는 벌레로도 충분하지만, 크게 자라면 박쥐나 개구리 등 웬만한 동물까지 먹어치운다고. 네펜데스가 설마 나까지 해치거나 초파리들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겠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원석 두 개를 포장해서 MOK과 동네 보석상에 들렀다. 유색 보석은 현장 감정이 가능한데 다이아몬드는 전문 감정원에 보내면 하루 내지는 이틀이 걸린단다. 급한 마음에 종로에 위치한 감정원 주소를 받아 우리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제 다이아몬드 감정이 한 시간 정도면 결과가 나온다.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멍 때리기는 싫은데, 건너편을 보니 너무나 입어보고 싶었던 한복 렌털 가게가 있다. 초식남에게 물으니 재미있겠다고 호응을 해주었다. 그렇게 난 빨간 곤룡포를 입고 MOK은 아씨 복장을 하고 창덕궁에서 신나는 한 시간을 보냈다. 젊은 친구들이 왜 돈을 내면서 한복 코스프레를 하는지가 이해되었다. 얼마나 죽이 맞았는지 우리는 낯부끄러운 동영상까지 찍었다. 이젠 흑역사를 공유했으니 서로 배신할 수 없는 징표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점잖게 감정원으로 돌아왔다. 


 캐럿은 중량의 단위이다. 지난번 루비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20mg으로 0.1 캐럿 다이아몬드라는 결론 났다.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드비어스 사의 합성 다이아몬드 (laboratory-grown diamond)인 '라이트박스(Lightbox)' 보다 컬러와 순도도 좋고 브릴리언트 컷 세공 솜씨가 놀랍다고 했다. 하긴 초파리가 자연적으로 만든 것이라서 사람의 손길과 다르긴 하지. 다이아몬드를 바라보는 MOK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지금 살아있는 초파리 절반이 흰 눈이니까 2주마다 배로 불어난다니 굉장한 증식 속도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다이아몬드가 확실하다니 앞으로 더욱 신중해야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원석을 팔다가는 자칫 장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 액세서리로 가공해 판매하는 것이 부가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 마침 MOK의 와이프가 디자이너라니 브랜드도 론칭하면 좋겠군. MOK과 헤어져서 꿈같던 하루를 마감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러 집에 들렀다. 몇 달 물도 주지 않았는데 식충식물 삼총사 중 파리지옥과 끈끈이주걱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낡은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추억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40원 진돗개 우표가 붙여진 우편엽서, 매월 말일은 편지 쓰는 날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족들과 결이 맞지 않아서 집 밖에서 인정받으며 위안을 찾곤 했다. 그러고 보니 타향살이를 하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스승이었고 친구였다. 나를 키운 건 팔 할 바람이었다. 누구를 위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오늘따라 센티한 기분이 들어 석양에 기대 빛바랜 편지 꾸러미를 읽기 시작했다.


베르니, 편지 잘 받아보았다.

귀신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고 계획성 있게 생활을 하기 위해서

베르니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시고

그의 하신 일은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하늘의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죽으셨단다.

이 선물은 믿음으로 받을 수 있고 

믿음, 즉 구원 얻는 믿음은 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영원히 신뢰하는 것이란다.

베르니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신뢰하지 않으련.

이만 쓸게, 안녕


84.8.20 진애경 선생님


 내가 과학에 빠져들게 된 것은 온전히 선생님 때문이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선생님은 어쩌면 그때부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내 앞으로 중보기도를 쌓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내게 과학은 현실의 고뇌를 잊고 마술을 펼치는 주문과도 같았다. 과학에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미래가 다가오는 듯했다. 코볼 (Cobol) 기초 프로그래밍을 배우는가 하면, 사이언스홀을 둘러보며 미래를 짊어질 희망에 부풀기도 했다. 남학생들과 섞여 실험을 하다 보니 정체성이 남자인 줄 착각하던 때도 있었다. 어른이 되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희생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성별을 바꾸기는 상당히 어려우니 대신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거나 출산을 하지 않음으로 남성과 동등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30년이 지나 세대가 바뀌더니 밀레니얼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1인 가구가 40%를 넘어서고 인구절벽이 도래한다. 초파리는 자연 상태에서 개체수를 불리는데 인간은 이데올로기와 생각이 많아 그렇지 못하다. 우리 부부도 공사다망하여 딩크족으로 문제없이 지내고 있으니 예전처럼 일률적으로 다산을 강요할 수는 없다. 과거보다 풍족해졌지만 과연 더 행복한지는 의문이다.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치열했던 나의 사춘기를 떠올리자면 할 이야기가 많다. 학교에서는 과묵한 모범생이었지만 집에서는 책상과 방문이 부서지도록 엄마와 싸운 적이 많았다. 집으로 오면 우울할 정도로 죽고 싶었고 컴퓨터와 음악이 나의 해방이었다. 전형적인 INFJ였으나 쿨했던 나는 친구들이 많이 따랐음에도 강남 8 학군이라는 좁은 바닥에서 어머니 때문에 친구들을 많이 잃었다. 엄마는 내 친구들을 라이벌로 몰아 훈계하시기를 즐기셨다. 정당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파워가 있어 친구들은 나의 엄마를 무서워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입을 다물고 좋아하는 것에만 몰두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오기로 술을 마셨다. 나는 엄마의 치명적인 실수로 약한 몸으로 태어났다. 사춘기부터 최근까지 악성 빈혈에 시달렸고 시력도 좋지 않았다. 병약한 육체를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살아왔는데 이 모든 근원이자 원인제공자인 공공의 적이 사라지고 나니 공허했다. 엄마가 틀렸다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전의를 상실한 심정이랄까.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어머니의 육신을 보며 물욕도 없어지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지난봄 창밖에는 꽃이 만발하고 엔데믹이라 사람들은 쏟아져 나오는데 집 밖으로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 나를 세상의 빛으로 비춰줬던 사람이 바로 초식남이다. 눈이 부셔서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바로 MOK이었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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