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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현실을 예리하게 통찰한 블랙코미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웃음과 비극이 교차하는 연출을 통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장기인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본성이란 무거운 주제를 단순한 웃음을 넘어,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게 통찰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사유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영화는 25년간 '태양'이라는 제지 회사에서 근속해 온 만수(이병헌 분)가 회사로부터 선물 받은 장어구이와 단란한 분위기에서 가을을 맞이한다. 처음엔 마치 이민자의 삶처럼 보였던 이 가족은 교외의 단독주택에 보금자리를 잡은 한국의 중산층으로 비쳤다. "다 이루었다"라고 감회를 밝히는 만수는 두 아이와 아내 미리(손예진 분), 두 마리의 애견과 함께 마당 깊은 집에서 행복감에 충만돼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 장어선물세트를 받은 사람은 해고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와 함께 안정된 삶이 무너져버린다. 가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 재취업을 결심하지만, 끝없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만수가 재취업 경쟁자를 제거하며 재취업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냉혹함과 인간의 도덕적 붕괴를 그려낸다.

만수가 해고를 당한 후 되뇌었던 "미국에서는 도끼질, 한국에서는 모가지"라는 명대사는 현대 사회의 고용 불안을 풍자하며, 이후 그 스스로가 도끼질의 주체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암시한다. 만수의 대사는 영화의 키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며, 관객들에게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는 만수의 말처럼 미국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Donald E. Westlake)의 소설 <액스(The Ax)>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97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중년 가장이 사회로부터 도끼질을 당하면서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 범죄 스릴러다.

이 작품에서 박찬욱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어젠다를 5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냉혹함과 인간 소외

영화는 산업 현장에 AI의 도입과 공장 자동화로 인해 인간의 노동력이 대체되는 현실을 배경으로, 구조조정과 실직이 개인과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만수는 해고 후 재취업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어쩔 수 없음"의 자기 합리화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어" 라며 혼자 되뇌듯 반복되는 대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과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관리자들은 해고를 '어쩔 수 없는' 일로 합리화하고, 만수는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감독은 개인의 선택과 사회 구조의 모순이 얽힌 현실을 날카롭게 조명하며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 시스템이 서로를 잠식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노노갈등과 시스템의 폭력성

자본주의 모순을 그려내는 대부분의 작품이 노사 간의 갈등을 그려낸 것과 비교해 이 작품은 노동자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약자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를 비판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단면을 조명한 것으로, 개인이 시스템에 의해 고립되고 소외되는 과정을 강조한다.


가족 해체와 인간성의 붕괴

만수의 극단적인 선택은 평온한 일상을 영위해 온 중산층 가정의 균열과 도덕적 타락을 불러온다. 그의 딸 리원의 첼로 연주는 희망 속에서도 웃을 수만 없는 비극적인 현실을 강조하는 장치로 잘 활용된다. 영화 초반에 제지회사 직원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만수와 대비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저버리는 그의 주변에 남겨진 건 거대한 기계음과 고독이 아니었을까.


삶의 아이러니와 블랙코미디

영화는 웃음과 비극이 교차하는 블랙코미디로, 관객들에게 씁쓸한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만수의 선택에 대해 관객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여기지만, 극 중 아내 미리를 포함한 관객들은 점차 그의 처지에 공감하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만수의 가족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점차 균열을 겪지만 아내 미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딸 리원은 첼로 연주를 통해 자신만의 언어를 표현한다. 도덕성을 잃은 만수와 대비돼 자기 언어를 찾는 과정과 대조를 이루며, 인간성과 가족애의 상실을 역설적으로 연출해낸다.

박찬욱 감독은 특유의 미장센과 독창적인 촬영 기법으로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한다. 반사경을 활용한 장면, 매치컷, 독특한 앵글 등은 시각적 재미를 더하며, 블랙코미디의 어두운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범모(이성민 분)의 집이 위치한 산등성이로부터 도망치는 만수를 추격하는 아라(염혜란 분)의 장면은 롱테이크를 통해 미학적인 연출 효과를 더했다.

영화 속에서 배우 이병헌은 만수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그의 몰락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를 떠올리는 미리 역의 손예진은 극 중 만수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며 그에게 강박을 심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흔들리는 가족의 위기를 봉합하는 대들보 역할까지 맡아 메서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특히, 영화에 삽입된 가수 조용필의 노래 '고추잠자리'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곡이지만 극도로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난투극에 흐르면서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극대화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언뜻 소환케하는 시퀀스에 감독은 배우들의 대사를 묻히게 하고 음악 볼륨을 극대화해 관객이 장면을 초현실적이고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배우 염혜란과 이성민은 블랙코미디의 해학과 코믹함을 가장 잘 표현해 냈다.

만수가 자신의 정원에 심은 사과나무속에서 아내 미리가 찾아낸 것이 무엇일지 영화는 열린 결말로 관객에게 숙제를 던진다. 당신의 가족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당신은 고발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영화 속 명대사 중 "저 사람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그동안 시스템에 의해 피동적으로 일관해 온 노동자들의 모습과 대조돼 만수의 주도적인 선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과 생존의 논리가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한다.

/소셜큐레이터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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