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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트라우마, 쏟아내야 치유되는 성장통

윤가은 세계 3부작,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조용한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세계의 주인>은 윤가은 감독이 <우리들><우리집>을 잇는 '윤가은 세계' 3부작이라 할 만하다.

이번 작품에서 윤감독의 시선은 '우리'라는 울타리를 넘어 비로소 '세계'로 확장된다. <우리들>에서 아이들 사이의 우정과 관계를, <우리집>에서 가족 간 갈등을 그려냈던 윤 감독은 '세계'와 극 중 주인공 '주인'(서수빈 분)에게로 시선을 옮겨 놓는다.

일생의 트라우마가 인간의 정체성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태도로 시작된 영화는 극 중 주인공이 피해자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트라우마 속에서도 견디기 힘든 현실을 극복해 가는 동력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감독의 페르소나처럼 이름 지워진 ‘주인’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 혹은 남들과 달라져야만 한다는 사회적인 시선 속에서 단단히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간다. 가족, 친구, 주변인과의 관계는 그에게 성장의 토대가 되어준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아동 성폭력이라는 다소 예민한 소재를 다뤘지만 전형적인 '미투(Me too)'를 주제의식으로 다뤘다기보단 한 학생에게 가해진 상처의 기억이 등굣길, 급식실 그리고 '교실 이데아'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윤가은 감독은 전작의 정서를 잇는 사춘기 소녀들 특유의 감수성에 주목하면서 내면의 고통을 쏟아내는 힘을 강조한다. 감추려 할 때는 깊어지는 고통이 비로소 겉으로 쏟아낼 때 치유의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시점에서 피해자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는다. 이로 인해 관객은 어떤 순간에도 그녀를 ‘누구의 피해자’로만 바라보지 않게 되고, 복합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주인'이라는 캐릭터는 한 가지 성격이나 평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매 순간 감정의 결을 바꿔 나가며, 어른들도 쉽사리 끝맺지 못할 자신의 상처를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그를 둘러싼 환경에 쏟아낸다.

그의 조금은 더 오버스러운 명랑하고 쾌활함은 상영 내내 언제 터져 나올까 하는 무의식적인 불안감 속으로 관객들을 몰아 넣는다. 그를 둘러싼 어른들, 또래 친구들과의 미묘한 거리감, 그리고 때론 침묵과 오해가 교차하면서 성장통을 겪듯이 여러 갈등을 빚는다.

윤가은 감독은 도망치지 않고, 결국 세계를 바라보고, 나아가 스스로 나다움을 찾아가는 소녀의 시선과 행보를 조명한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닌 소녀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통해 관념적인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는지 주목한다.

중 신예 서수빈과 신스틸러 장혜진의 연기와 호흡은 극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서수빈은 신예답게 내면의 불안과 혼란을 세심하게 표현하며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연출한다.

안방극장에서 오랜 연기 공력은 다져온 장혜진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안정감을 통해 소용돌이치는 주인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정선을 균형감 있게 받쳐준다. 두 배우는 실제 모녀 관계처럼 현실감 있는 호흡으로 관객에게 진한 울림을 선사한다.

소녀가 스스로의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자신이 중심이 되는 세계의 주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통해 윤가은 감독은 3부작을 완성한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작은 사랑이 소녀가 들어가는 세계를 지탱케 해준다고 성찰하는 듯하다.

치유란, 결국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 소셜큐레이터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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