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키가 비슷해서 너는 내 뒷번호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입이 커서 네 별명은 메기였다
메기는 교실보다 논에서 살았다
학교가 끝나면 일해야 한다며 집에 가기 바빴다
사춘기를 맞은 우리는 밤이면 모여서 술을 마셨다
가로등 하나 없던 시골이었기에 숨어서 마실 일도 없고
여느집 정제마다 아부지가 먹고 남긴 소주 댓병이 있었기에 술을 구하는 것도 쉬웠다
우리의 화려한 밤 기행은 술에 취해 수박서리를 하다 걸린 후 끝났다
그 일로 일주일 근신을 받고 국궁장을 다듬는 일을 해야했다
16명이 투입됐는데 농사는 해봤어도 공구리치거나 벽돌 쌓는 건 모두 처음이라 진도가 안 나갔다
메기는 16인의 도적들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수업보다 일하는 게 낫다며 우리를 도왔다
적당히 물을 넣고 시멘트를 개고 부삽으로 적당량을 떠서 벽돌에 바르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올리는 메기의 손은 우리를 감탄시켰다
"너는 이걸 왜 잘 해?"
-아빠 도와서 자주 해
메기의 아빠는 큰집 창고를 혼자서 지으셨다고 했다
큰집도 손수 짓는 메기네였지만 자기 집은 없었다
메기네는 큰집에 얹혀살고 밥도 얻어먹는 신세였다
메기는 꿈이나 취향과 상관 없이 농고에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돈을 벌러 서울로 갔다
축구할 때나 같이 놀았던 사이라 고등학교 진학 이후 메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스무살 여름방학에 우리는 만났다
메기는 한 발 먼저 노가다판에 뛰어든 형을 따라 다니며 돈을 벌고 있었다
메기와 친했던 시골친구 A는 방학동안 알바를 하려고 메기를 찾아왔었다
나도 방학이라 A의 연락을 받고 메기를 오랜만에 보게 됐다
우린 신림역에서 만났다
셋이 모여 어디 가서 밥을 먹을까 머리를 맞대던 중 우리는 모두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겨 대로에서 서로를 욕하며 크게 웃었다
둘은 아직 월급을 못 받아 돈이 없었고
나는 방학에는 알바를 할테니 용돈을 보내주실 필요가 없다고 집에 호기롭게 선언해놓고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다시 머리를 맞대고 묘수를 찾다가 그 동네에서 여자동창 B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B는 중학교 3년 내내 A를 좋아했던터라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A는 3년간 B를 외면해왔는데 어떻게 얻어먹냐고 당황했지만
종일 힘쓴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기에 못이긴 척 따라왔다
B는 모처럼 칼퇴를 하고 신림역으로 왔다
약속시간에 10분 늦었지만 짝사랑, 옛사랑을 재회하는 데에 든 치장 시간으로는 짧은 편이니 우리는 기꺼이 환대했다
우리는 조끼조끼? 어쭈구리? 투다리? 그런 술집에 들어갔다
메뉴판과 함께 나온 마카로니를 먹으며 자연스레 B에게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B "너네가 골라. 나 잘 못 골라"
-쏘는 사람이 골라야지!
B "어????"
B는 당황했다. 우리가 사정을 얘기하자 B는 대로에서 우리가 웃은 것처럼 크게 웃으며 내가 돈이 없었더라면 어쩔뻔 했냐며 놀랐다. 그러면서 오늘 돈이 별로 없어 28000원밖이라며 미안해 했다
그날 뭘 먹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28000원은 기억난다
두메산골 촌놈들이 서울에서 처음 만나 만찬을 즐긴 28000원은 이후에도 여러 번 복기했기 때문이다
메뉴는 기껏 두어 개 시켰지만 우린 그 술집에서 3시간 여 떠들었다
10시가 가까워지자 헤어져야 했다
우리 셋은 지하철로 1시간 거리인 내 하숙집에 가서 자기로 했다
역사로 들어갔는데 빈곤한 주머니는 또 문제를 일으켰다
B와 나의 정액권 외 둘의 차표를 살 돈이 없었다
우린 결국 2인 세트로 개찰구를 통과했고 하숙집이 있는 역에 내릴 땐 담을 넘어야 했다
먹다만 술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둘의 눈빛에 나는 단골 감자탕집으로 갔다
이모님께 학생증을 맡기고 감자탕을 주문했다
외상으로 먹는 술은 왜 더 달까?
우린 소주를 들이붓고 여름밤처럼 달콤하게 취해갔다
소주가 여덟병을 돌파할 때쯤 메기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명징아, 고맙다."
-낯간지럽게 왜 이래
"저 귀한 학생증을 맡기고 술을 사주다니 너무 고맙다."
-학생증이 뭐가 귀해. 쓸 데도 없어.
"학생증으로 술을 먹을 수가 있구나. 나는 쌀을 팔아서 술을 먹으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야?
메기는 그날밤, 6년전으로 우리를 되돌렸다
학교종이 울리자 마자 논으로 달리는 메기는 분식집으로 향하던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고 한다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나가 공을 차던 메기는 매점으로 향하는 우리를 볼 때면 수돗가로 가 물을 퍼먹었다고 한다
친구들하고 놀고 싶어도 늘 큰아부지가 매를 들고 기다리고 있어서 놀 수 없었다고 한다
큰아부지는 화가 많은 사람이라 일을 하다가도 괭이든 삽이든 메기에게 던지기도 했고
밥을 먹다가도 작은 꼬투리를 잡고 밥상을 엎을 때가 많아 메기는 밥 먹는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여차하면 밥을 못 먹게 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우선 입에 쑤셔넣고 소화는 위장에 맡겨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뚝배기에 나오는 국밥이더라도 5분컷이라며 자랑했다
중 2때 쉬는 시간마다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추던 당시에
메기는 티비를 본 적이 없어 같이 어깨춤을 출 수 없었다고 했다
그 해 7월 우리 무리의 한 친구 생일날이었다
메기도 그 친구와 국딩때부터 친했던 터라 생일파티에 오고 싶었다고 한다
생일자 어머니가 상을 차려줘서 먹을 건 해결됐지만 우린 술을 사려고 2천원씩 걷기로 했다
메기는 그 2천원을 마련하려고 큰집 뒤주에서 쌀을 훔쳤다고 한다
쌀을 훔쳐 달리는 메기는 행복했다고 한다
정신 없이 논둑을 달렸는데도 숨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달려 쌀집에 가서 쌀을 팔았는데 주인아저씨가 왜 쌀을 파는지 어디서 난 쌀인지를 물었고
당당히 답하지 못한 메기를 수상히 여긴 아저씨는 큰집에 전화를 넣어 확인했다고 한다
메기는 다시 쌀을 품에 안고 달려왔던 논둑을 걸었다
집에 가면 받을 매질과 분노한 큰아부지 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그보다 우리와 같이 파티를 하지 못한 서러움에 통곡했다고 한다
논둑에 땅거미가 깔리고 큰집 지붕에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쯤 도착해
메기는 대나무로 만든 매가 갈가리 바스라질 때까지,
뒷산의 소쩍새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술판을 벌인 우리가 취해서 잠들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메기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지만 눈물은 계속 났다고 한다
우린 메기가 형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친했던 누구도 메기가 큰아부지에게 맞고 사는 것도 몰랐다
메기는 감자탕집에서 울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을 하고 담담히 어린 시절을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듣는 네 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넘쳤다
A는 고개를 못 들고 술잔을 넘겼고
나는 메기에게 미안하게 꺼이꺼이 울었다
다시 그로부터 25년 후 어제
회사에서 일하는데 메기에게 톡이 왔다
"고척돔에 타이거즈가 오는데 보러 가자!"
서로 사는 동네가 거리가 있어 일년에 한 두 번 보는데 연락이 왔다
그래서 기꺼이 고척돔으로 향했다
나와 메기, 그리고 메기가 참석하고 싶었던 파티의 주인공 생일자 셋이서 만났다
경기는 지루했고 응원팀은 졌다
핑계가 생겼으니 2차를 갔다
"많이 바쁘냐?"
메기의 질문에 나는 요새 얼마나 바쁜지, 너희들에게 연락도 못할 정도로 왜 바쁜지 침 튀기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메기의 사업은 어떠냐 물었다
평일 오후 3시에 야구장으로 출발할 사장의 사업은 어떤 상황일지 궁금했었다
메기는 부품 만드는 사업체를 한다
직원 단 한 명, 같이 온 친구다
메기는 10년 전 충무로에서 기름밥을 먹던 그 친구를 불러들였다
메기는 가정과 친구를 건사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친구의 미래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어깨가 더 무거웠으리라
그런데 작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며칠 밤새 일하던 어느날 몸이 욱씬거려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그 욱씬거림이 익숙하게 느껴졌단다
가만 생각해보니 큰아버지의 매질이 떠올랐단다
그 매질에서 도망쳐 서울에 왔는데 수십 년이 지나서도 그 고통을 안고 산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단다
그때,
경기도 작은 도시에 아파트 하나 사서 세 식구 부족함 없이 살고 친구까지 책임지고 있으니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때부터 "즐기면서 살자"를 모토로 정했다고 한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고 적당히 놀면서 편하게 살기로 했다"
그 말을 듣는 나는 적당히 감동하지 못했다
다시 25년 전 감자탕에 앉은 내가 돼 다시 울었다
'고생 많았다. 마음껏 헤엄치며 살아라, 메기야'
물론 낯간지러서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잠이 들 때까지 이 말을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