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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잌 Nov 02. 2019

그 호텔은 불타버렸어

이집트(1), 다들 나한테 왜 이러나 싶을 때

"그 호텔은 며칠 전에 불타버렸어"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기사가 말했다. 하필 미리 골라둔 가장 저렴한 호텔이 불타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엄청 큰 화재여서 불길이 대단했다고 한다. 거기 말고 다른 갈 곳은 있느냐고 물었다. 플랜 B 같은 건 세워놓지 않았기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시만요... 라며 여행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자기가 알고 있는 싸고 깨끗한 호텔이 있으니 그리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위치도 내가 가려던 곳과 그다지 멀지 않으니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겨우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인데도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자칭 information 센터에서 일한다는 남자가 택시 잡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따라붙었다. 공항 안에는 여행객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빠르게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날이 어두워지면 그땐 정말 더 무서울 것 같았다. 하는 수없이 남자를 따라 걸었다. 남자가 제시한 택시비는 내가 예상했던 것의 두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처음부터 꼬인다 싶었다. 그런데 호텔까지 불에 탔다니.


"오케이, 땡큐"


당신이 알고 있는 호텔로 가자고 했다. 어디든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카이로에 도착하기 전 터키에서 며칠 연속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다니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게다가 감기에 심하게 걸리는 바람에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침대에서 두발 쭉 뻗고 쉴 생각을 하며 택시 뒷좌석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택시는 어느새 시내로 들어섰다. 카이로가 복잡하다는 건 책에서 읽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8차로쯤 되는 도로에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당나귀, 리어카, 사람(!?!) 등이 잔뜩 뒤엉켜 있었다. 양방향 도로인 것 같은데, 도로의 흐름만 보면 차선이 어디로 뻗어있는 건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도로 위에다가 온갖 종류의 탈 것을 한가득 쏟은 다음 제멋대로 휘저어 놓은 것 같았다. 경적소리, 고함소리, 동물 울음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일 저 틈을 걸어 다녀야 할 텐데 치어 죽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틈에 택시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가장 싸고 구린 호텔만 찾아다니는 내가 보기에도 더러운 곳이었다. 느끼하게 생긴 프런트의 남자가 도미토리와 더블룸은 모두 찼고 싱글룸만 남았다고 했다. 싱글룸에는 방 안에 개인 화장실이 있다며 아주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대단한 화장실 변기 안에는 지난 투숙객의 배설물 덩어리가 하수구로 미처 내려가지 못한 채 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변기를 노려보며 잠시 고민했다. 샤워를 꼭 해야 할까. 내 몸에서 나는 냄새와 화장실 냄새 중 뭐가 더 심한지를 비교해 보다 눈을 질끈 감고 슬리퍼를 신은 채로 샤워를 시작했다. 도저히 맨발로 화장실 바닥을 밟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한 번도 빤 적이 없는 것 같은 베개에 차마 머리를 내려놓을 수 없어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 침대에 누웠다. 양말도 챙겨 신었다. 맨 살이 침대에 직접 닿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든 살이 닿았다가는 당장에라도 몹쓸 병에 걸릴 것만 같았다.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늘 와보고 싶었던 이집트인데, 드디어 이 곳에 왔다는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어찌나 몸부림을 치며 잤는지 눈을 떠보니 이불은 온몸에 휘감겨 있고, 얼굴은 베개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지난밤 깔끔을 떨었던 게 민망할 정도였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방을 나서자 프런트의 남자가 끈적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택시비와 싱글룸 비용으로 예상치 못한 큰돈을 지출하는 바람에 환전한 돈의 대부분을 다 써버렸다. 돈을 뽑을 곳을 찾아보려고 걸음을 옮기던 중 놀라운 광경에 발을 멈추고 말았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눈동자를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굴리는 동안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며칠 전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던 그 호텔이 눈 앞에 떡하니 서있었다. information 센터 남자의 얼굴과, 택시기사의 능글맞은 웃음과, 호텔 프런트 남자의 끈적한 목소리가 차례로 떠올랐다. 이런 @#F!%3. 이집트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Excuse me?

Japanese?

Do you want camel?

Do you know how much?


정확하게 이 순서로 말을 거는 낙타 장수들을 스무 명도 더 지나쳤다. 5분 간격으로 한 명씩 따라붙는데 싫다고 해도,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해도 그들을 떼어낼 수는 없었다. 자기가 할 말의 할당량은 다 끝내고 나야 나를 보내줄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한 낙타 장수의 영역 가장자리에 도달하면 바로 뒤 이어서 다음 낙타 장수에게 인수인계되었다.


이집트까지 와서 낙타 한 번쯤 안 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돈이 없었을뿐더러 사실인지 괴담인지 몰라도 '혼자 온 여자가 낙타를 타면 돈을 더 내기 전에는 내려주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겁이 났다.  


기자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사막 한가운데에 신비롭게 서 있는 피라미드를 상상했는데, 피라미드 바로 옆까지 포장된 도로로 관광버스가 사람들을 잔뜩 실어 나르고 있었다. 다들 낙타, 말, 당나귀, 택시,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는 길을 혼자 옆구리에 물통을 차고 식식대며 걸었다. 걸을 때마다 땀이 줄줄 흐르는 다리에 바지가 착착 감겼고 벗어서 허리에 질끈 묶어놓은 재킷 때문에 배에도 땀이 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는 신비로웠다. 쿠푸왕, 카프레왕, 멘카우라왕, 여왕의 피라미드를 보니 이집트에 온 실감이 났다. 그런데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어야 할 스핑크스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앞뒤가 없는 피라미드의 '앞'이란 어느 방향을 말하는 것일까에 대해 조금은 생각을 해봤어야 했다. 하지만 길치들이 으레 그렇듯 그냥 꽂히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관광객보다는 들개를 마주치는 빈도가 더 잦아졌다. 주변은 이제 온통 모래뿐이라서 방향을 가늠할 수 없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길을 걷는 건 점점 더 힘들어져 눈물이 날 지경이 되었을 때, 20살 안팎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따라왔다.


'얜 또 뭐야'


혹여나 말을 걸까 봐 눈길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런데 계속 졸졸 따라온다. 누구라도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그 남자를 돌아보고 무작정 스핑크스!라는 단어를 외쳤다. 아무리 반복해도 못 알아듣더니, 여행책을 펼쳐 사진을 보여주니 그제야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엄청난 크기의 스핑크스


스핑크스에 도착하고 보니 이렇게 큰 걸 못 보고 지나친 내가 참 대견할 정도였다. 스핑크스 주변을 뱅뱅 돌면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름의 원인을 찾았다. 스핑크스는 피라미드보다 지대가 낮은 곳에 있는 데다가 피라미드에서 바라보는 스핑크스의 뒤통수는 심하게 마모되어 그저 맹숭맹숭한 돌덩이 같아 보였다. 그래도 남들은 참 잘도 찾아가는 길을 돌고 돌아 땀범벅이 되어서야 도착하다니.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여행객들의 얼굴이 뽀송뽀송 참 산뜻해 보였다.


스핑크스의 뒤통수


혼자 도보 사막투어를 마친 후라 호텔로 돌아왔을 땐 이미  파김치가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행객과 마주쳤는데, 짧은 금발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자신을 Maja라고 소개했다.


"특별한 계획이 없다면 같이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


12월 31일이었다. 우리는 연말 기분을 내기 위해 파티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새해가 시작되는 순간을 복도 끝 공동 화장실 옆 방에서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해수욕장에서 파는 3천 원짜리 폭죽처럼 푸쉬쉭 소리를 내며 힘없이 올라가다 이내 사그라드는 불꽃놀이를 사람들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데 그 누구도 카운트 다운을 할 생각은 없어 보여서, 우리끼리 10, 9, 8, 7을 세다가 자정에 맞춰 Happy New Year를 외치며 팔짝팔짝 뛰었다.


그 소리에 갑자기 수많은 시선들이 우리를 향했다. 축제 분위기에 취한 수십 명의 남자들이 이미 사그라든 가냘픈 폭죽보다 더 흥미로운 볼거리를 찾은 듯 보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관광객도 우리가 유일한 것 같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온 남자들이 어느샌가 우리를 빙 둘러쌌고, 우리가 몸을 틀 때마다 그 방향으로부터 원은 점점 더 안으로 바짝 조여왔다. 한두 명이 손이며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고, 이내 뒤에 맨 가방과 다리에도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비켜달라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다리 위에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심장박동은 점점 빨라지는데 머릿속은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Maja가 독일어로 마구 호통을 치며 정면에 있던 남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찰진 소리가 밤공기를 뚫었다. 모두가 놀라 잠시 주춤하는 사이 우리는 냅다 달렸다. 외국인 여자에게 뺨을 맞은 것이 수치스러웠는지, 짝 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결국 연말 파티는 포기하고 길거리에서 산 빵을 먹으며 정처 없이 걸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우울에 빠져있다가 졸업논문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든 여행을 떠나온 독일 여자와 여행 와서 바가지 몇 번 썼다고 송곳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던 한국 여자가 만나 그야말로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은 밤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곤히 자고 있는데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빼꼼히 연 문틈 사이로 프런트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호텔에서 연말 파티를 하려는데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피곤하다고 말하자, 그럼 술만 좀 사다 줄 수 없겠냐, 아니면 여권이라도 잠시 빌려줄 수 없느냐 라며 내 눈치를 살핀다.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라 술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외국인인 내 여권을 빌려 술을 사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문을 닫았다.  


얼마나 더 잤을까. 우웩우웨엑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방 옆 공용 화장실에서 누군가 오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술을 사다 준 모양이다. 밤새 헛구역질만 요란하게 해 대는 그 소리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은 룩소르행 야간열차를 탔다. 불편한 의자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배낭을 가슴에 껴안고 창쪽으로 몸을 틀어 자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에 잠이 깨서 보니,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 엉덩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남자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 앞을 보고 자세를 고쳐 앉을 뿐 미안하다는 말도 당황한 표정도 없었다. 자기 자리로 삐죽 나온 부분은 만져도 된다고 생각한 건가. 이집트에서는 여행 내내 정말 다들 나한테 왜 이러나 싶은 생각뿐이었다.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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