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기분
홍콩을 여행지로 정했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유럽에 대한 낭만주의와 아시아에 대한 근거 없는 권태 때문이었다. 그저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저렴하고, 적당한 시간만 있으면 여행할 수 있다기에 직장인으로서 가장 적당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새벽 한 시가 넘어 내린 공항에서 편의점 야식을 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홍콩은 참으로 도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평소 도쿄를 좋아했기에 이런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도쿄만 같아라.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저 선선함을 느끼기엔 어딘가 정겨웠다. 지난날 유럽 일주를 하며 마주했던 기분들이 몰려왔다. 한국에 나를 두고 온 듯한 느낌. 온전히 새로운 나를 만날 것만 같은 기대감이 스멀스멀 단전 어딘가에서 벅차오르고 있었다.
2층 버스에 오를 땐 특히 런던 생각이 많이 났다.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아 정처 없이 웨스트엔드를 유랑했던 기억, 그날들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홍콩에 감사했다.
이렇게 가까이 유럽이 있었구나.
비슷한 점들을 많이 찾았다.
홍콩섬 그리고 구룡반도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서유럽의 정취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특히 길거리가 주는 인상들이 그러했다. 굽이굽이 나있지만 정갈한 골목에서부터 좌측통행하는 자동차들, 거리를 누비는 2층 버스, 구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트램, 요상한 모양의 메트로 표지판, 가로 간격이 좁은 지하철 그리고 보행신호를 개의치 않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까지.
무엇을 만나든 꼭 유럽이 배어있다고 생각했다.
허유산을 입에 달고
홍콩을 거닐었다. 총 3일간의 여정 동안 마신 허유산만 5잔이나 된다. 그만큼 난 허유산을 좋아했고, 그것은 유럽에 없던 것이다. 2층 버스를 타고 구룡반도를 관통하는 동안 휘양 찬란한 간판들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그것도 유럽에 없던 것이다.
강인 줄 알았던 바다를 건너며 페리 위에서 홍콩의 밤빛을 감상했다. 온갖 잡화로 가득한 몽콕 시장을 인파 속에서 거닐었다. 빅토리아 피크의 세찬 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중국 대륙을 가늠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며 틈틈이 보이는 홍콩 사람들의 일상을 엿봤다. 엄청난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센트럴 역 환승 개찰구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홍콩이었다.
여행의 경험이 쌓이며 나도 모르게 홍콩을 이전 여행지들과 자꾸 비교했었다. 여긴 어디와 비슷하구나, 저긴 어디와 또 다르구나, 이건 그것에 비해 별로구나 등등.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여행을 많이 다녀 내게 어떤 식견이 생겼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만큼만 보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온전히 홍콩을 느끼지 못 했다. 공항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던 밤, 괜한 후회와 아쉬움이 마음 한켠에서 넘실거렸다. 그래서 나의 홍콩 여행기는 보다 더 낭만주의에 취해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느끼지 못 한 아쉬움을 글으로나마 온전히 느낀냥 잰 체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어디 여행만 그런가 싶다. 살면서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것들을 쉬이 판단하고, 비교하고 규정지으려 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사랑에도 그랬고, 부모에게도 그랬고, 나의 꿈도 때론 그렇게 취급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쌓여가는 것이기에 앞으로도 난 쉽게 비교하고 아는 범위 내에서 느끼려 들것이다. 지금까지 쌓여온 날 단번에 떨쳐낼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으니까.
다만 점진적으로 나를 넓혀간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일의 여행은 홍콩에서의 기억 때문에 또 너무나 달라져있을 것이다. 어떤 모양일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음이 내가 여행하는 이유다.
미지를 마주하고, 알던 것과 비교하고, 그것만의 고유성을 깨닫는다. 나에겐 주로 그것이 바람으로 다가온다. 홍콩을 떠나던 날 밤이 돼서야 바다내음 잔뜩 품은 선선한 바람이 홍콩의 것임을 느꼈다. 기분이 묘해져 바다 쪽을 바라봤다. 미풍이 머릴 쓰다듬듯 불어와 괜히 아련해졌다.
홍콩의 기분 end.
사진은 직접 촬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