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어! OO 씨 지금까지 어떻게 산 거야? 남자 셋 다 장난 아니네..."
다짜고짜 수화기 저쪽에서 튀어나온 말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순간, 무당역으로 분한 개그우먼 이수지가 떠올랐다. '사기' '기선제압' '정신 쏙 빼놓기.' 머릿속 이성이 내게 다급하게 경고 사인을 보내왔다. 정신 차려ㅡ 휘둘리지 마ㅡ. 그러나 감정은 이미 버선발로 뛰어나온 후였다. 그것은 수화기 저 편의 타로 상담사 앞으로 순간 이동을 해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거 참 용하네. 재미있네."
얼마 전 지인이 타로점을 봤다며 해준 이야기에 나는 대강 장단을 맞춰주었었다. 구미가 당긴 것은 아니었다. 살면서 한 번도 타로점을 본 적이 없었다. 돈도 아까웠다. 게다가 전라도 광주라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며칠 후, 나는 우연히 아들 방에서 새어 나온 통화 내용을 듣고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저 학업에 흥미가 없는 아이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니 부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저 무료하고 무탈하게 흐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삶은 또 다른 장르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레벨이었다. 엄마인 내가 울고 짜고 명상을 해서 마음을 달랜다고 해결될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청소년 상담센터를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24시간 상담이 가능하다고 했다. 지역번호와 공통 번호인 1338을 누르면 됐다. 031-1388. 통화 중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02-1388. 역시나 통화 중이었다. 이 시간에? 032-1388. 통화 중. 도대체 이 밤에 전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는 신음하며 다른 지역번호를 떠올렸다. 그렇게 타 지역의 청소년 상담센터의 상담 선생님과 전화 연결이 되었다.
내가 아들에게서 (엿)들은 것은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내가 과민할 수도 있었다.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랬으면. 제발 그랬으면.
상담사분도 난감해하셨다. 아들의 통화 내용만으로는 당장 누구와 무슨 일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뭔가를 판단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일단 오늘 밤에 아들에게 따로 묻지는 말고, 다음 날 문의해 보라며 다른 곳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나는 밤새 악몽 속을 허우적거렸다. 정면에 너른 들판과 하늘이 맞닿아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혼자였지만 그곳이 지옥인 걸 알았다.
다음 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전화를 건 다른 청소년 센터 담당자와의 통화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별다른 정보도, 경고 혹은 위안의 말도 듣지 못한 채 그저 '아들과 잘 얘기해 보시라'라는 답변만 받았다. 지난 20년간 내 삶의 우여곡절을 지켜본 멘토이자 가까운 지인과 통화를 나눈 후에야 나는 조금 진정되었다. 일단은 아들은 믿어주는 마음을 조금 더 갖자, 성급히 말을 꺼내지 말고, 관련하여 좀 더 전문가로부터 정보를 모으자는 것이 그녀의 조언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강한 날이었다. 두피가 몹시 뜨거웠고, 벌겋게 달구어진 팔이 후끈거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뙤약볕을 받으며 벤치에서 세 시간 동안 돌처럼 앉아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연예인 A와 B도 찾아왔었다던데? 전화 상담도 가능하다더라."
불현듯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혹시나 싶어 찍어두었던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 혹은 호구. 바로 나였다.
명리학과 타로를 함께 본다는 그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평범했다. 가족의 생년일시를 묻고 잠시 후 내게 다시 전화를 해온 그이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와는 딴판이었다.
"이 놈의 새끼들! 미안해요, 내가 막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괜찮습니다..."
나는 이미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그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와 아들이 놓친 기회들을 비롯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말했다. 내 말을 듣다가 중간에 말을 멈추라고 하고는 본인이 타로카드를 뽑았다. 나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안타까워했다가, 슬퍼했다가, 그럴 줄 알았다고 무조건 인정하기도 했다. 온몸으로 경청했다. 그녀는 내가 타로점을 보게 된 이유인 아들의 통화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상황에는 처했지만 무난하게 지나간다'라고 '분석'했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여전히 미심쩍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 내가 느낀 감정은 변명의 여지없이 '안도'였다.
"아이고 OO 씨, 스스로 머리에 칼을 열 개나 꽂았네. 자꾸 어딜 가려고 해? 어디 가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걱정도 그만해요. 미래가 어떻게 될까, 이런저런 생각을 딱 멈추라고. 그리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 지금 본인이 죽게 생겼는데 누가 누굴 돌봐? 아내로, 엄마로 역할을 하기 힘들면 그냥 자리만 지킨다 생각하고 있어 봐요."
"있잖아요, 이 남자들 셋. OO 씨가 어딜 간다고 해도 힘들고 괴로워서 떠난다고 생각 안 해. 그냥 놀러 가나보다 한다니까? 떠난다고 아무도 안 잡아.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떠나버리면 셋 다 무너져. 그냥 OO 씨가 이번 생은 내가 이 사람들 옆에 있어준다고 마음먹으면 안 될까? 응 OO 씨?"
"아, 그리고 부부의 연은 절대 안 끊어져. 한 명이 죽어야 끝나. 그러니까 평생 간다고."
어느새 그녀는 나를 달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큰 아이가 열아홉이 되는 내년? 군대 간 후인 내후년? 혹은 작은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는 3년 후? 그것도 안된다면 작은 아이가 스무 살이 되는 7년 후......?
나는 수시로 가늠해보고 있었다. 언제쯤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언제쯤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언제쯤. 언제쯤.
타로가 이런 것까지 본다고?
이런 것까지 알아맞힌다고?
그런데 난 정말 못 떠나는 건가. 젠장...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느 점쟁이나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다. 점쟁이 기본 매뉴얼에 나와있는지도 모른다. 1) 남자만 있는 집의 꽤 많은 여자들이 속이 썩어 있다. 아들들도 그 모양인데 남편마저 도움이 안 된다. 2) 그래서 그런 여자들은 점쟁이를 찾는다. 3) 점쟁이는 그 놈들은 원래 그 모양이라고 일러준다. 4) 그렇지만 어쩌겠냐, 그들을 구원해 줄 사람은 여자인 당신밖에 없다고 결론을 지어준다. 5)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는 자신의 기구하고 숭고한 운명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묵묵히 그 역할을 수행하다가... 죽는다.
젠장.
다음 날, 나는 기회를 노리다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아들에게 접근했다(말을 걸었다.).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정곡법은 위험하리라 판단했다. 아들에게 오히려 비난 혹은 역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엄마가 꿈을 꿨는데 너무 뒤숭숭해서."
나는 그것을 꿈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아들에게 전했다. 부디 아들이 알아먹기를 바라며.
"엄마,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내가 왜 남의 집에 무단침입을 해? 오번데? 완전 개꿈이네."
열여덟. 속이려면 누구든지 속일 수 있는 나이. 그러나 나는 아이를 믿기로 했다. 예의주시하면서. 타로는 타로고, 앞으로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고2. 학기 초의 긴장감 때문인지, 혹은 조금 마음을 먹은 건지, 나아진 건지 아들은 그럭저럭 학교에 나갔다. 안쓰럽고 기특했다. 덮어놓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러나 어느덧 5월 마지막 주. 이번 주 내내 아들은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좋아, 지옥엔 내가 가겠다."
오늘 아침,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왔다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눈을 찔끔 감았다. 감은 눈 밑으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두 딸 키우는데 앞이 죄다 지뢰밭이었다니까. 별의별 일이 많았지. 큰 애가 공부를 엄청 잘했어서 바로 취직될 줄 알았는데... 얼마 전 취직했다니까? 이제 서른둘이야. 작은 앤 스물여덟이고. 그리고 아직 육아 안 끝났어..."
오늘 낮, 버스 옆자리에 앉은 지인의 말을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가 지옥에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천이고 망할 놈의 지옥이 두렵다.
지뢰는 밟으면 터진다. 치명적이다.
믿고
믿고
믿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왜,라는 질문은 집어넣고.
그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떠날 것이다. 떠나 낼 것이다.
내 머리에 박힌 칼 열개도 내가 뽑아 던지겠다.
생각 같아서는 프로레슬러처럼 칼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짐승처럼 포효하며 양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지만, 그렇게 댕강 두 조각을 내고 싶지만, 근육 제로의 달랑거리는 초라한 허벅지라 그러진 못하겠다.
* 아들은 잘 지켜보고 있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이렇게 또 약간의 수명이 단축되었다.
- 죄송합니다만 위의 타로사에 대해서는 답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었습니다.
- (이제 와서) 기독교인으로서 조금 조심스럽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