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환하게 웃는 이가 가장 어둡게 아파본 사람이라 했다.
밝고 환한 곳에서 다시 그 곳을 바라 볼 수 있는
그런 구구절절한 시절을 보내고 나면
어둠 속에서 형채를 몰라 두려운 것들 모두
환해지고 나면 선명해지는 걸 안다.
지금의 어둠에서 어떻게든 기어 나와
저기까지만 가면 이건 아무렇지 않아 진다는 걸 안다.
나에게 그건 친절이고 웃음이었다.
이 아득함에도 꾸역꾸역 웃어 내면 마치 빛이 잡힐 듯 가까워진다.
그러다보면
아무도 나를 돕지 않고
누구도 나의 편은 없고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고
이 것이 끝나지도 않을 것을 알 때에도
내가 나를 웃게 할 수 있어 졌다.
그러고 나면 또 반대로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를 잃고
제일 편리한 나를 골라 잡는다.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동정하다 화가 나다가
그런 것들을 다시 또 처음부터 반복한다.
그러다보면 형채를 몰라 두려웠던 것들 조차
어둠에 적응된 눈이 나름의 형채를 더듬어 안도에 이른다.
그렇게 더듬다보면
터널 어딘가에는 스위치가 있을 것이다.
꼭 환한 곳까지 나가지 않아도 안도할 수 있는
그런 전환과 그런 다짐이 있다.
가끔 스위치를 켜고
터널 나름의 구조와 규칙과 조화를 읽어가며 기쁘게 밖으로 나가기도 하며
모든 터널에는 스위치가 있다는 걸 믿는다.
끝내 닿은 희망과 긍정은 너무나 강력하다.
그러니 가장 환하게 웃는 이가 가장 어둡게 아파본 이가 맞을 거다.
여전히 스위치가 있는 문조차 열 수 없는 그런 터널도 있다.
스위치가 있는 걸 알지만 도저히 문조차 더듬을 수 없는 아득한 캄캄함이 있다.
아직 그게 뭐였는지 내가 알 수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사건 혹은 사고.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마음이 놓였다.
이 캄캄함을 편히 부를 단어가 생겨서.
오래도록 트라우마 안의 스위치도 켜게 될 거라 믿었지만
그만한 고통과 상처는 인생의 어느 길 하나를
고장내고 닫을만큼 강력하다는 걸 아주 오래 서성이다 알았다.
오랜만에 또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도 안되는 이대로가 나의 부족이 아니어서.
당황스러울 필요 없이 하루 한 켠에 종종 있는 시간이지만 나는 누구보다 늘 해맑다.
인스타도 스레드도
아니 사실 나의 오프라인도 모두
나는 여전히 밝지만
우는 날의 나는 여기에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