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8월에 방영을 시작한 '쉬헐크'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은 헐크(브루스 배너)의 사촌이자 변호사인 제니퍼 월터스다. 우연한 사고로 사촌오빠인 브루스의 혈청이 체내에 들어가 여성 버전의 헐크가 된다는 그런 내용이다. (쓰고 보니 좀 유치하지만 마블 시리즈는 유치한 맛에 보는 거니까)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거기서 치토스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브루스는 사촌동생 제니퍼의 차를 타고 여행을 가다가 차 가운데 놓인 치토스 한 봉지를 집어 든다. 열려 있는 과자 봉지에는 젓가락이 꽂혀 있었다. 이게 뭐니 하고 묻자 제니퍼는 손가락에 빨간 치토스 가루가 묻는 게 싫어서 젓가락으로 먹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 한 동안 머릿속에 치토스 생각이 가득해졌다. 어린이 시절에도 좋아한 과자는 아니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당시 치토스 안에 '따조'라고 하는 종이 딱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걸 모으려고 환장해서 치토스를 사재기하는 친구들도 있긴 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어린이들 (심지어는 일부 다 큰 어른들까지) 포켓몬 빵에 들어있는 '띠부띠부실'이라는 것을 모으느라 난리라는데... 역시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쉬헐크를 보다가 젓가락으로 먹는 치토스의 맛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희한한 우연의 일치일까? 근처에 사는 친한 동생네 부부가 치토스를 다섯 봉지 들고 작업실에 찾아왔다. 아내 쪽에서 생일 선물로 치토스 한 박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서 온 오리지널 치토스였다. 제니퍼 월터스가 젓가락이 벌게지도록 먹던, 바로 그 치토스. 인생은 가끔씩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곳에서 절묘한 타이밍을 자랑한다.
그렇게 조금은 진중한 미국 치토스 시식이 시작되었다. 나무젓가락을 구해 와 조심스럽게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드넓은 초원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가의 카메라를 발견한 프레리독처럼, 주의 깊게 과자 봉투를 관찰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Flamin' Hot' 매운맛. 봉투를 열어 보지 않아도, 상당히 불량한 맛이 예상되었다.
쓰여 있는 문구를 좀 더 살펴보았다. 'Cheese Flavored Snacks'. 치즈맛 스낵. 치즈 스낵이 아니라 치즈맛 스낵이다. 로고 위에 아주 작은 글씨로 'Made with Real Cheese!'라고 적혀 있다. 너무 작아서 스스로도 그 말을 믿는지 의심 갈 크기로. 'See Nutrition Information for Total Fat Content'. 전체 지방 함량은 영양성분표를 보세요... 역시 미국인들은 지방에 민감하다.
뒷면을 보니 제조사인 프리토레이Fritolay의 로고도 있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주소도 있다. 그리고 글루텐 프리 마크가 붙어있다. 미국인들은 글루텐 또한 민감하다. 어딜 봐도 불량식품인데 글루텐 프리가 중요한가? 하지만 이렇게 가득한 모순 때문에, 나는 더더욱 치토스가 먹고 싶어졌다.
손에 힘을 주어 봉투를 열었다. 미국 과자봉지 특유의 얇고 반질반질한 촉감. 위쪽 라인이 깨끗하게 열린다. 나무젓가락으로 한 개를 집어 보았다. 마젠타에 한없이 가까운 붉은색의 가루가 가득 묻어 있었다. 이래서 젓가락으로 먹는구나. 손으로 집으면 빨갛게 물들 것이 뻔한 가루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한 조각 집어 먹어보았다.
역시... 내가 예상한 정확한 그 맛이 났다.
인체에 유해할 것 같은 맛. 요리사가 아니라 화학자가 만든 맛. 마트에서 남편이 집어 들면 아내가 등짝을 후려칠 것 같은 저급한 맛.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맥주와 곁들여 먹으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고 실패자로 남을 것 같은 맛. 너무 짜고 맵고 자극적이었다. 어디 작정하고 너의 삶을 망쳐 보거라 하는 그런 맛이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다섯 조각 정도 먹고 난 이후였다.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집어먹게 되었다. 젓가락을 던져버렸다. 손으로 집어 먹는 게 더 편하다. 두세 번 먹고 나니 (역시나) 손가락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안 봐도 뻔하지만 혓바닥도 비슷한 색깔로 물들었을 것이다. 각종 화학 물질이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혈관벽을 더럽히는 게 느껴졌다.
치토스 가루가 묻은 손가락을 대충 닦아내고, 강아지에게 가져가 보았다. 만수르(7세, 비숑프리제)는 잠깐 코를 킁킁거리더니 불쾌하다는 듯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 개도 거부하는 그런 과자였다. 나는 멋쩍어져 빨간 기가 가시지 않은 손가락 끝을 비벼 보았다.
순식간에 과자 세 봉지를 클리어하고 느꼈다. 역시 먹길 잘했다고.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때때로, 순전히 호기심에서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중학교 때 친구에게 얻어 피운 담배처럼. 코딱지를 파서 입에 넣어 보는 네 살 아기처럼. 48개월 리스로 지르는 스포츠카처럼. 후회할 줄 알면서도 굳이 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역시 후회한다. 하지만 스스로도 안다. 후회하기 위해 그 짓을 했다는 것을. 인간은 때때로 후회하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