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얼거리던 티브이의 소리가 뚝 끊겼다. 언제나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제일 늦게까지 다른 나라의 축구 경기를 보는 큰 인간이 막 자러 들어간 모양이다. 집은 완벽히 어둠 속에 잠겼다. 밤잠이 없는 몇몇 전자기기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빨간색 빛들이 별들처럼 빛날 뿐이다. 나는 부엌의 싱크대 뒷면 다리와 벽 사이의 좁은 틈에서 빠져나온다. 그다음엔 수많은 다리들을, 마치 야구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파도타기 하듯이 순서대로 쭉 뻗어대며 기지개를 켠다. 아주 작게, 뽀드득거리는 소리들이 난다. 좋아. 이제부터는 우리의 시간이다.
*
나는 이 넓지 않은 집을 구석구석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벽과 벽이며, 틈과 틈이며, 모서리와 모서리를 내키는 대로 쏘다닌다. 사냥을 다니는 것도, 짝짓기 상대를 찾는 것도, 새로운 거주지를 탐색하는 것도 아니다. 목적 없이 걸어 다니기. 사람들은 이걸 산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산책 중에 먹거리- 모기, 진드기, 작은 나방, 새끼 바퀴벌레나 바퀴벌레의 알 등을 만났을 때 굳이 먹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맛있게 먹는다) 마음에 드는 짝짓기 상대를 만났을 때 역시 그냥 지나가지는 않는다. (나의 늘씬하고 기능적인 다리들을 빠르고 우아하게 움직여보며 환심을 사려 노력해 본다) 하지만, 아직도 배가 빵빵한 오늘이라면, 어쩌면 나는 산책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각다귀를 만난다 해도 먹지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틀 전에 길을 잃고 이 집에 들어온 큰 벌레 한 마리를 함께 잡았다. 모두가 일주일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포식했다. 사냥을 할 필요가 없기에, 다른 네 명의 내 가족들은 좁고 축축한 곳에 배를 깔고 편히 누워 있다. 어제도 나오지 않았고, 오늘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일도.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시다. (30개가 넘는 다리 하나하나마다 움직여대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차원일 것이다)
배가 부른데 대체 왜 돌아다니는 거야? 사람에게 들킬 수도 있다구.
식구들은 이런 질문을 매일 한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들을 이해시키는 것을 나는 한참 전에 포기했다. 달성해야 할 목적, 채워야 할 욕구 없이, 나의 다리를 움직여서 걸어가는 것, 이미 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공간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또는 오늘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될까 하고 산책을 시작해도 단 하나의 새로움도 만나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즐겁게 한다. 무엇보다, 부엌, 거실, 다용도실과 베란다, 현관과 옷장, 그리고 낮동안 이 모든 공간들에서 활개치고 다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퇴각하여 침대 위에 콩벌레처럼 몸을 만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침실까지- 어둠에 잠겨 모든 것들이 뚜렷한 외곽선을 잃어버린 채 희미하게 섞여있는 공간들을 둘러보는 게 좋다. 이동할 때마다 어떤 것은 다가오고 어떤 것은 멀어지며, 어떤 것은 뚜렷해지고 어떤 것은 흐릿해진다. 밤의 풍경에는 모든 게 너무 선명한 낮과는 다른 포근함이 있다.
나는 누군가가 밤에 샤워를 하느라 채 습기가 빠지지 않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바닥 타일에 아직 남아있는 물을 몇 모금 마신다. 거실에서는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가, 사람들이 엉덩이를 올리는 바닥 쪽 쿠션과 등을 기대는 세워진 쿠션 사이의 틈을 파고들어 간다. 어쩌다 그 안까지 굴러들어 와 껴 버린, 콤콤한 냄새가 나는 단백질 조각의 맛을 본다. 바다에 사는 오징어를 잡아 말린 다음 길게 자른 음식이라는 것 같은데 썩 내 취향은 아니다. 그다음엔 벽을 기어올라가 천장까지 도달한 다음, 거실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베란다 새시를 기어 내려간다.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여름도 이제 끝나가는 모양이다.
“오늘도 나왔네”
말을 거는 놈은 거미다. 이중으로 되어 있는 베란다 쪽 새시 중 중간에, 그러니까 실외도 실내도 아닌 공간에 집을 지은 지 이제 한 달쯤 되었다. 거미는 원래 우리의 라이벌이다. 아니 라이벌은 조금 순한 단어일 수도 있겠다. 서로가 먹고 먹히는 관계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친구와 내 사이엔 언제나 새시가 있고, 여름 내내 사람들은 그 새시를 한 번도 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쓸데없이 긴장할 필요가 없었고, 언젠가부터인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거미줄에 날개와 다리가 붙은 채 꿈틀거리는 각다귀를 발견한다. (배가 부른데도 입에 침이 고였다) 거미줄에는 그 외에도 몇몇 작은 날개 달린 곤충들이 붙어있다. 몇몇은 살아있고, 몇몇은 죽은 채로.
”새시와 새시 사이에 집을 지어놓고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잡을 수가 있어? “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팔자 좋은 너희들은 딱히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실수로 집에 들어왔고, 꼭 나가야만 하는 사정이 있는 친구들은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바깥과 더 가까운 곳으로 오려하거든. 예를 들면, 새시 두 개보단 새시 한 개만 있는 이곳으로 말이지.”
확실히, 어딘가에서 바깥 냄새가 나긴 한다. 인간이 만든 것들은 모두가 허술해서 우리들은 조금 둘러보기만 해도 드나드는 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산책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왜?”
거미의 겹눈 하나하나가 모두 조금씩 작아졌다.
“작은 인간이 얼마 전부터 밤에 혼자 기어 다녀.”
우리에게 제일 무서운 존재는 바로 작은 인간이다. 큰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한다. 맨 손으로 우리를 잡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뭔가 도구가 필요하다. 큰 인간들이 패닉에 빠진 상태로 몸을 돌려 허겁지겁 무엇인가를 찾고 있을 때 우리는 유유히 도망가면 된다. 하지만, 작은 인간은 다르다. 우리를 만나면, 일단 손을 뻗어 잡고 본다. 호불호 없이, 그냥 움직이는 모든 것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잡는 데 성공했다면, 대부분의 경우 다짜고짜 입에 넣는다. (프로이트라는 인간의 말에 의하면 구강기라는 것 같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작은 인간에게 잡혀서 운명을 달리 한 선조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나는 거미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곤 책꽂이 위를 타고 올라간 다음, 코너를 돌아 작은 침실로 들어간다. 침대에서는 중간 크기의 인간이 모로 누워서 쌕쌕 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다. 나는 인간의 머리맡을 지나 책상 위로 올라간다. 온갖 종류의 책이며 노트며, 연필과 아이패드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그릇에는 먹다 만 참외도 두 조각 남아있다. 물기가 많고 시원한 단 맛이 기분 좋다. 산책을 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큰 침실의 문은 닫혀있지만 들어가는데 문제는 없다. 하지만 나는 조금 망설인다. 큰 침실에는 큰 인간 두 명과 함께, 작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인간은 이 집에 들어온 지 이제 8개월이 되었는데, 그 덕분에 나는 인간이 얼마나 늦게 자라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1개월이면 다 자라고, 멋진 30개의 다리를 우아하게 움직여서 벽도 천장도 탈 수 있다. 그에 비해 인간은 8개월이 되도록 스스로 이동하지도 못하고, 다 자라도 다리가 겨우 네 개뿐인 데다가 벽이나 천장을 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인간이 바닥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사실 나는 인간이 별로 무섭지 않다. 벽이나 천장을 타고 빠르게 도망간 다음 틈새로 숨어버리면 그만이다. 작은 인간이라고 벽을 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쫄 이유는 없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을 다스리며 나는 문틈 밑으로 들어간다. 그다음엔 다리를 타고 큰 침대 위로 올라간다. 큰 인간들이 네 개 밖에 되지 않는 다리를 제각기 이상한 방향으로 펼쳐놓은 채, 서로 등을 돌리고 자고 있다. 머리맡을 지나 다른 쪽 끄트머리에 도달한다. 작은 인간이 사용하는 작은 침대는 큰 침대보다 낮아서, 이쪽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인간의 침대는 비어있다. 순간 나는 오싹함을 느낀다.
침대를 기어 내려오고 벽을 타고 오르는 방법을 터득해 버린 작은 인간과의 목숨을 건 추격전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사방이 작은 인간을 위한 장난감들이 담긴 서랍으로 가득 찬 작은 방에서 작은 인간을 발견했다. 층간 소음 방지를 위해 두텁게 깔아놓은 매트 위에서 공룡이며 트럭과 경찰차며 고무볼과 동물 인형들 사이에 둘러싸여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토실토실한 두 쌍의 다리 살이 여러 겹으로 접혀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 알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리가 열 개 밖에 없던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작은 인간의 가슴께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숨소리가 작은 방을 채운다. 색- 쌕 - 색 - 쌕 - 색 - 쌕 -
*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창가에서 희끄무레 들어오는 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사물의 경계를 다시 그리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트리케라톱스, 브리키오사우르스와 티라노사우르스가, 순찰차와 소방차가, 털북숭이 동물 인형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쨍한 색으로 물든다. 어두컴컴한 밤에 잠들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다. 하지만 이런 우연이 산책의 즐거움인 것이다.
나는 작은 인간이 아직도 깊이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30개의 다리를 차례로 쫙 뻗어대며 기지개를 켠다. 소음방지 매트에 30개의 작은 자국들이 순서대로 찍힌다. 그다음엔 부지런히 다리를 놀려 작은 방을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낮이든 밤이든 빛이 들어오지 않는 주방의 싱크대 뒤편 틈으로 돌아온다. 내 가족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벌써 잘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의 산책은 즐거웠어?
응- 오징어도 먹고 참외도 먹고, 작은 인간도 구경했어.
작은 인간? 너 용케도 안 먹히고 살아 돌아왔구나.
그런데 말이야. 작은 인간도 우리처럼 벽을 기어 다닐 수 있는 것 같아.
……진짜?
확실하진 않은데… 그렇지 않으면 침대를 혼자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
그거 진짜 무서운 이야기다… 모두에게 이야기해 줘야겠어… 그런데… 하암… 너무 졸려서, 내일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모두가 잠든 축축하고 어두운 틈에서 나 혼자만 말똥말똥하다. 아무래도 밤잠을 너무 길게 잔 것 같다. 큰일이다. 길고 긴 낮을 어떻게 보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