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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 살기로 결심하다

진정한 애도 2 _ 엄마에게 쏟을 것까지 아빠에게 다 쏟기, 있을때 잘해

  사실 엄마가 살아계신 때, 일하다가 임용후보자 선정시험을 보다가 계속 이런 반복 속에 이십대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엄마에게 남들처럼 명품 가방을 해 드리거나 하는 식으로 큰 효도를 해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있다.

  돈을 아주 잘 벌지는 못했지만 계절에 한 번 정도는 모녀가 같이 고속터미널에 나가 옷도 고르고 엄마에게도 약소하게나마 한 가지씩 선물로 옷을 사 드린 일이다.


  또 한 번은 엄마랑만 단 둘이, 당시로는 강남에서 고급 뷔페로 이름난 식당에서 엄마랑만 단 둘이 식사를 한 일이다. 아마 겨울 2월에 엄마 생일을 기하여 그나마 좀 안정적인 벌이, 그래 봐야 학원 강사 분필 묻은 푼돈이지만 학원에서 전임 강사를 할 때 한 번 거하게 엄마 생일에 맞추어 엄마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린 것이 지나고 보아도 참 잘한 일이라 여겨진다.


  또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봄.

  집에서 엄마가 늘 아침부터 밤까지 들으시는 라디오, 카세트 기기가 고장 나서 새로 사 드린 일이다. 

  그나마 그때 학원 파트 타임 강사를 하고 있어서 그래도 그때 큰맘 먹고 당시로는 가장 좋은 기능이 복합적으로 있는 제품을 사 드렸다.[CD 및 USB, 카세트 테이프 재생, 라디오까지 다 되는 인켈 제품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저렴하게 구매하여 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제품은 아직도 본가에 있어서 엄마 없는 수납장 위에서 아빠와 함께 우두커니 먼지바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엄마는 알고 있었는가 보다. 엄마가 조만간 우리 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루는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랬다고 한다.


  "우리 꽃네가 나한테 인켈 라디오를 선물해 주었네. 그런데 나는 이제 우리 꽃네한테 해 줄 게 없는데 어떡하지, 엄마. 우리 꽃네한테 미안해서 어떡하지."




  2010년 초, 엄마는 이미 그때 단 하나인 딸래미인 나 때문에 많이 속상하셨다.


  내가 갑자기 번아웃이 오고 온 몸과 마음이 춥고 세상이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 못해서 집에 콕 박혀서 방에서도 나오지 않고 히키코모리처럼 며칠동안 행동한 것이다.


  그런 나를 마냥저냥 두고 보지 못해 엄마는 방 문을 화들짝 쳐열고 들어와서 뭐라고 뭐라고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이상 이참에 이 기회에 내 마음과 몸의 상태를 지금 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결연하게 마음 먹은 것이다. 


  "세상이 너무 무서워. 나 지금. 너무 몸이 춥고 마음에도 바람이 불고 춥고 무서워서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그렇게 울부짖고 한참을 운 것 같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턴으로 일하던 엄청나게 멋지고 큰 조직에 처음으로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가 갑자기 우리가 맡은 전체 프로젝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 진행을 확신할 수가 없어서 일차적으로 제일 말단이고 홍보, 마케팅을 맡기로 한 내가가장 먼저 정리 당한 것이다.


  매일 사랑 받고 사랑을 주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하고 앞날을 계속 그리던 곳에서 갑자기 내일부터 너는 우리 소속이 아니니 더이상 이곳에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하나도 담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담담한 척 마무리하고 쿨한 척 말하고 행동한 것이 어쩌면 내 마음을 감추느라 내 마음을 잘 돌보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나는 충격을 상당히 받았고 이제 어떻게 다시 이 험한 세상에 나를 좀 받아들여 달라고 나 일 잘한다고 알랑방귀를 다시 뀌어야 할지 감도 못잡는 상태가 된 것이다.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정신과 마음, 몸이 모두 붕괴된 것이다. 요즘 애들 말로 더 와닿게 표현될 수 있는 이름하여 '멘붕'인 것이다. 


  어째거나 가족같은 조직에서 거의 일년여를 동고동락하다가 갑자기 그렇게 팽 당하니 그런 일을 처음 겪은 29-30살의 나는 차마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버겁고 납득이 되지 않은 것이다.


  하루 아침에 소속이 없어지고 내일 아침부터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세상을 전부 잃은 사람이 된 것이다. 마치 진한 연애를 일 년 가까이 하다가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처럼 몸도 마음도 상실감과 겨울 추위에 얼어붙고 만 것이다. 


  내 생애 처음 겪는, 세상이 주는 얼음땡 놀이의 서막. "얼음" 하면서 얼어 붙게도 하고, 때로는 그런 우리에게 "땡"을 해 주기도 하는 거대한 세상.

  그러나 그때 나는 누구도 나를 "땡"해 줄 수 없다고 이번 "얼음"은 정말 처음 겪는 일이고 어떻게 이 "얼음" 상태를 지나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땡"을 해 준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우리 엄마다.


  엄마 앞에서 울부짖은 후 엄마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로 나에게 그러면 다시 나아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서 기도하고 무조건 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며칠동안 우리는 서로 부여잡고 울고 불고 기도를 드렸다.

  서로 회개하고 회개를 드리고.


  엄마는 그때 최초이자 최후로


  "그동안 너를 키우는 동안 엄마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엄마가 미안하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부모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미안하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게 치면 나는 정말 여한이 없다. 

  돌아온 탕녀 같은 삶을 여태껏 살았지만 그토록 철옹성 같은, 내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우리 엄마에게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나는 들었다. 또 찔러도 눈 하나 까딱 하지 않을 것 같은 우리 아빠에게서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해 겨울과 봄.

  우리 엄마와 나는 완전한 화해를 하고 서로 풀 것을 다 풀고 축복과 같은 시간을 보내며 같이 밥 먹고 라면 끓여 상추에 싸 먹고 칼국수 끓여 먹고 밥 먹고 나서 맥심 믹스 커피를 타 마시며 친구처럼 지냈다.


  그래서일까. 바보처럼 나는 엄마가 하늘 나라로 돌아갔는데도 두세 달만 슬퍼하고 더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엄마가 연초에 그렇게 나를 세상으로부터 세상이 "얼음" 한 것에 대해 "땡" 해 준 것으로 인하여 나는 모든 것이 풀리고 보상 받고 그동안 모든 결핍이 다 채워진 기분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엄마가 가려고 겨울에 그토록 마지막으로 엄마와 다 화해하고 풀게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나름대로 해방감을 맛보았다.

  

  꿈에 대한 해몽, 무의식과 관련된 꿈 중에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것도 나를 갑자기 팽한 조직의 수련회 강연에서 들은 것이기는 하다.] 가장 좋은 꿈이 부모를 죽이는 꿈이라고 하였다. 초자아를 파괴 내지는 극복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해방, 자유로운 자아로 가는 의미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꿈도 아니고 나의 삶에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거대한 초자아 중에서도 초자아인 엄마의 죽음은 나에게 완벽한 해방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를 낳고 젖도 한 달인가 혹은 며칠 먹이지도 않고 한 달밖에 안 된 핏덩이 아기인 나를 바로 외할머니에게 유배 내지는 귀양을 보낸 엄마. 그래서 우리 사이에 애착이 생길 리는 만무했다.


  그리하여 엄마 살아 생전에 우리는 서로 많이 늘 사랑하고 그리워하였지만 그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아, 샴쌍둥이처럼 어기적거리면서 산 엄마와 단 하나의 딸의 유기체.


  그래서 엄마와 나는, 내가 4-5살, 6-7살에 되었을 때 다시 만났지만 사돈 남 보듯 나는 엄마 주위만 배회하고 겉도는 사이가 되고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 엄마를 '아줌마'라고 하여 엄마는 나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엄마가 더이상 시골에 애를 맡겨 놓으면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힘들지만 나도 이제는 서울에서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다.


  그렇게 나는 집에 왔지만 엄마가 참 어색했다. 그리고 엄마도 그것을 감으로도 실제로도 확연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 한스러운 세월을 다 표현할 수 없음에 나는 망각이 때로는 약이 됨을 정확하지 않은 기억과 망각이 우리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그와중에 나의 초등학교 입학이 코앞에 닥쳐 엄마는 나에게 한글을 무진하게 가르치려고 애썼다.

  어디 학습지가 과외에 맡기면 더 나았을 것을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는지 아니면 바쁘고 일많은 엄마의 교육 정보에 대한 부족이나 무지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남에게 맡기면 더 나았을 것을 나를 끼고 엄마가 가르치다가 더 안좋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의 가르치느라 힘들었던 엄마와 배우느라 고통스러웠던 엄마와 나와의 이야기는 그 고생을 더 말해 무엇 하나 싶기도 하다.


  그땐 돈도 많았던 엄마는 왜 나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한글을 깨치게 하지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게 큰이모나 큰외삼촌에게 맡기기도 서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 엄마 나름대로 애착을 못한 아이에게 집착적인 사랑을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리라고 짐작한다.


  엄마는 너무 아이를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 및 이것은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으니 한글을 깨치고 초등학교 보내는 일을 자신 스스로 마쳐 보겠다는 한글 떼기를 엄마표로 완성해 보겠다는 일념에 가득 차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엄마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한글 떼기라는 것이 일곱, 여덟 살에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책 안 읽히고 놀리기만 하고 가나다라마바사도 잘 안 한 아이에게 한글 깨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엄마들은 모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의 열정이 너무 큰 나머지 오히려 엄마는 잘못하는 나를 급기야 때리고야 말았다. 심지어 머리를 벽에다 부딪히기도 하고 비키니 장롱 옆 벽 한쪽 구석에다가 딸을 몰아 넣고 나무 막대기 혹은 회초리로 스스로 분에 못이겨 사정없이 때리기도 하였다.


  한글을 못 읽고 잘 못 쓴다고 하여서 그렇게 맞을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모두들 아는가. 한글도 못떼고 학교에 갔지만 책을 잘만 읽었고 오히려 그 고통과 고생과 상관 없이 미용실 사업을 하느라 손님 받기에 분주한 엄마 덕(?)에 나는 늘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가위로 오리면서 노는 아이로 자라났다.


  책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이 상상하고 공상하는 것도 좋아했다.

  오리기도 잘하여서 종이 인형 놀이를 하면서 친구랑 같이 상황 설정도 하고 상상의 세계 속에 공주가 되기도 하고 하녀가 되기도 하고 숙녀가 되기도 하고 숙녀들의 엄마가 되기도 하고 왕자가 되기도 하면서 기쁘고 즐겁게 나름대로 재미 있게 공부도 곧잘 하고 착실하면서도 잘 놀며 사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리하여 돌아보면 애착이 너무 지나쳐 열정까지 가미된 엄마의 집착이 때로는 내가 크는 동안 내내 엄마를상실하기 전 2009년까지도 꽤 나에게는 그물처럼 나를 옭아매고 나를 짓누르는 거대한 쓰레기더미 같기도 하였다. 나를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않은 나머지 나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집착하며 살다가 2010년에서야 모든 것을 풀고 스스로 나에 대해 "얼음" 하던 것을 어느 순간 스스로 "땡" 하고 홀연히 떠나간 나의 엄마. 단 하나밖에 없는 이 세상 어떤 엄마와 딸의 관계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지 않은 우리만의 단 하나 뿐인 유일한 모녀의 관계를 선사한 우리의 서사.


  그런데 동생을 낳고 나서 서른여섯 살의 엄마가 산후우울증을 앓고 엄마는 삶이 힘겨울 때가 닥치면 종종 그렇게 약한 우울증을 앓고 갱년기가 오고 나서부터는 조금이라도 사람이나 사건으로 인해 신경을 쓰는 때면 불면증이 도져서 신경증을 앓곤 하였다. 그것이 엄마가 돌아가기 전 6-7년의 세월에 계속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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