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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누군가 내게> 연재를 열며

by 영롱

마감이 있어야, 또 마감이 임박해야만 글이 써지는 마법 또는 질병. 그렇게 또 스스로 정한 마감일에 이르러 글을 쓴다. 스스로 마감을 정하고 글을 쓰는 첫 시도라 마음의 응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누군가 내게>는 요사이 나를 붙잡고 있는 집요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 내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이야기들, 누군가 내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건내며 더 나은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살면서 살아가면서 후회되는 일들, 말들, 순간들, 선택들, 돌아서서 그러지 말걸 하다가 이내 그마저 체념하고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SNS에서 만난 주옥같은 말들을 캡쳐했다가도 이내 그 애틋한 마음은 다 휘발되고, 나는 또 관성에 따라 내 몸에 익은 방식으로 선택하고 말하고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것만 같다.


누군가 내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이야기들. 실은 엄마를 통해서, 가족들을 통해서, 선배들을 통해서, 친구들을 통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수도 없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내게 각인되지 않고, 제때에 제자리에 전달되지 않은 것만 같다. 그저 흘려보내진 말들, 돌아보건데, 지금의 삶을 충분히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늦게 얻은 나의 아이는 적어도 나와 같은 아쉬움과 후회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이 마음이, 지금 간절해진 그 말들이 잔소리가 되지 않으려면, 글이라는 형태로 남아 언젠가는 언젠가는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더불어 이글을 쓰며 남은 삶은 그래도 내가 내 입으로 말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고 지켜내며 살기를 바라는 기대로 글을 연재하기로 한다.


늦은 결혼과 출산으로 얻은 아이의 곁을 내가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 지금의 내 나이만큼에 이를 때까지만이라도 곁을 지켜줄 수 있다면 너무나 좋겠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하며 살아내며, 그리고 의지해도 좋을 누군가를 만나 생각을 같이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기댈 곳, 사라지지 않는, 손에 잡을 수 있는 엄마의 마음 같은 것을 남겨두고 싶다.


이것은 그러니까 마음이지 정답일 수는 없다. 실은 여전히 답을 모르는, 모르겠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어른이 되면, 엄마가 되면 알게될거라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을 나는 여전히 온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부분은 이해가 되면서도 어떤 부분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고, 내 마음에 켜켜하게 쌓여 나를 짓누른다. 한편으로는 이 글들이 나 스스로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그저 잔소리하는 또 다른 어른의 넋두리로 남겨질까 두렵기도 하다.


늦은 결혼과 출산은 나 자신의 체력도 떨어진 상태에서 아이와 부모를 돌봐야 하는 두 가지 미션이 쏟아져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를 절절하게 체감하게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대로 일하며 돌보며 살면, 그렇게 당면한대로 살기만 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막연히 있다. 늦은 덕분에, 그 덕분에 지난 세월과 경험이 내게 심어준 데이터들이 그래도 어느정도의 안정적인 결정을 하게 하기도 하니, 늦은 결혼이 썩 나쁜 것만은 아니긴 하다. 과거보다는 조금 나은 방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 모르면 묻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몸에 익어가고 있다.


아, 정말이지, 솔직한 글을 쓰고 싶다. 아니 에르노 처럼은 자신없지만 그의 글이 내게 용기를 주는 것 처럼 솔직하고 솔직해서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다. 또, 할수만 있다면 시몬 베이유 처럼 통찰과 사유의 깊이가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와 아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내가 보는 엄마는 늘 사랑에 목마르고, 내가 보는 아빠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랑을 줄줄 모르는 사람 같다. 그 속에서 어쩐지 자식들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모든 가정이 그러하겠지만 완벽하지 않았고, 결핍이 있었고, 그럼에도 어른들이 그 시간을 살아내주어서 그것에 기대어 우리는, 나와 동생은 심지를 가지고 큰 것 같다. 그렇다. 어느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커버린 자식들은 평생을 추억할 만한 빛나는 몇몇의 순간들의 기억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덮어버린다.


평범한게 최고다


이 말을 종종 들었다. 살다보니 이 평범함이라는 것은 굉장히 도달하기 어려운 기준이었다. 실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정상성으로 못박힌 그것 외의 범주의 것들을 부족한 것으로 만드는 기준같다.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에게 이 평범함을 주어지게 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간절한 바램과 노력들이 이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돈을 벌고, 세금을 내고, 소비를 하며 사회가 이어져간다.


참말로 모두가 결혼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인생을 오롯이 느끼고 품으며 시간을 누리며, 예술을 하고, 새로운 것들을 세상에 내놓는 그런 삶을 그려본다. 정말 정말 이건 선택의 영역이라고, 결혼이라는 정상성은 실은 정상성이 아니었다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더 편안하게 지금의 나에 이르렀을 텐데 말이다.


불안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삶은 정말 온전히 시간을 쌓아가는 거라고, 누군가 일찍이 말해줬더라면.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런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를 자라게한 어른들의 가여운 상황과 고단함을 생각하면 나는 감히 그 만큼도 살아낼 자신이 없어서,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내게 보낸 그 모든 마음과 애씀에 늘 감사한다. 그럼에도 연약한 인간인 그 어른들이 야속하고 밉고 슬프기도 하다. 그런 모든 상황과 감정들이 내게 감각되지 않았더라면, 예민하지 않았더라면 삶이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역시 주어진 것. 내가 선택할 수 있지가 않다. 그저 주어진 것을 잘 핸들링하는 것이 살아가는 지혜임을 이제야 조금 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를 위해, 그리고 아이를 위해 용기를 내어 연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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