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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26. 2018

공짱구 그 출생의 비밀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 5백 년 전 노나라의 창평향 추읍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오늘날 중국 산둥성 취푸가 바로 그 지역입니다. 그곳에 가면 공자가 태어나 살았던 곳, 제자를 가르쳤던 자리, 그의 무덤까지 볼 수 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공자의 고향은 그리 번화한 곳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공자를 두고 ‘추읍 출신의 시골뜨기’라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공자孔子의 본래 이름은 공구孔丘입니다. 공자의 ‘자子’는 위대한 스승에게 붙이는 칭호예요. 공자가 훗날 뛰어난 인물이 되자 그를 높여 부른 호칭이지요. 풀이하면 ‘공씨 선생님’ 정도가 될 거예요. 그의 본래 이름, ‘구丘’는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머리 모양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아마도 심각한 짱구였나봅니다. 공짱구라고 해야겠어요.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씨顔氏였다고 해요. 어라? 좀 당혹스럽지 않나요? 공구, 공짱구의 아버지는 공씨여야 하는데 ‘숙량흘’이라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후대 사람의 설명에 따르면 ‘숙량흘’에서 ‘흘’은 이름(名)이고 ‘숙량’은 그의 자字입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부를 때 자와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숙량흘도 그런 경우라는 것이지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공자세가孔子世家>라는 글이 있어요. 공자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일대기를 담은 글입니다. 여기에는 공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이 있답니다. 사마천은 이 둘이 ‘야합野合’해서 공자를 낳았다고 해요. ‘야합’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들에서 만났다’는 뜻입니다.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다른 기록에 따르면 숙량흘과 안씨의 나이가 꽤 차이 났다고 합니다. 안씨는 십대 후반의 앳된 소녀였던 반면, 숙량흘은 70이 다 된 노인이었다고 해요. 어머나!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지만 참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입니다. 요즘도 놀라 자빠질 일인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요? 사마천이 ‘야합’이라 표현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요?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산둥성 취푸] 공자와 관련된 여러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공자의 출생을 설명하는 또 다른 열쇠를 살펴봅시다. 공자의 자字는  ‘중니仲尼’입니다. 여기서 ‘중仲’은 둘째를 의미해요. 첫째라면 ‘백伯’을 썼어요. 그러니까 공자는 둘째라는 뜻이지요. 그에게 형이 있었습니다. 잠깐! 공자의 어머니는 10대 소녀였고, 공자의 아버지는 70 넘은 노인이었다고 했지요. 그럼 공자의 형은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요? 맞습니다. 공자의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지요. 


전하는 사연은 이렇습니다. 공자의 형에게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숙량흘은 다시 아들을 낳기 위해 애썼지만 딸만 줄줄 낳았다 해요. 그러다 뒤늦게 안씨를 맞아 둘째 아들 공자를 낳았다는 이야기지요.


정말 그럴까요? 저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 이야기가 정말 ‘전설’이 아닌가 질문해 보곤 합니다. 억지로 설명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아무리 첫째가 장애를 가졌다 한들, 둘째를 보겠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나이 70이 넘을 때까지 아들 하나를 낳지 못했다는 말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공자의 아버지가 ‘공흘’이 아니라 숙량흘이라는 것도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서 저는 공자의 아버지는 아무런 이름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실제로 숙량흘은 추읍 출신의 하급무사로 역사에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세상이 이름을 떨치자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찾다 보니 같은 고향의 인물의 이름을 빌려와 쓴 건 아닐까요? 이렇게 보면 공자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게 됩니다. 


[공자성적도] 공자의 행적을 그린 그림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요? 때로는 발칙한 상상이 과거 인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일본의 한 학자는 공자 어머니 안씨가 무녀巫女, 무당 출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공자를 성인으로 높이며 신성시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펄쩍 뛸 이야기였지요. 그러나 저는 그 이야기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공자가 하늘과 사람, 전통과 문화에 대해 심오한 통찰을 갖고 있었던 이유를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를 상상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논어>를 잘 읽어보면 공자는 결코 좋은 출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신분과 출신에 상관없이 다양한 제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아마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마천의 기록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어요. <공자세가>를 보면 공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어요. 채 20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납니다. 흥미롭게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아버지의 묘소를 알았다고 해요. 뒤늦게 아버지의 묫자리를 찾아 어머니를 함께 묻지요. 이 기록을 참고하면 친가와 긴밀한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귀히 낳은 둘째 아들을 이렇게 대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공자의 어린 시절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랐거나, 그렇지 않으면 서자로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어려서 여러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렸다고 해요. 


훗날 공자가 꽤 명성을 얻었을 때의 일입니다. 태재太宰라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공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나 재주가 많으신지 참으로 성인이라 할 수 있겠네요.”(9-6) 

언뜻 들으면 칭찬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은 공자를 은근히 비꼬는 말입니다. 딱히 잘하는 일 없이 자잘한 재주만 많다는 뜻이니까요. 신분이 높은 귀족 입장에서 재주가 많은 건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태재의 말을 들은 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재가 나를 잘 아는구나! 어려서 천했던 탓에 자질구래한 일을 많이 했거든!”

보통 사람이라면 불우한 과거를 숨기고 싶었을 테지요.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거기에 연연하지도 않았습니다. 출신이나 지위가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지요. 공자는 누구나 배움(學)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끝내 해결하지 못한 질문, ‘공자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공자가 어떻게 대답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피식 웃고 말지 않았을지요. 한편 그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반문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공자의 제자들에게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문제였나 봐요. <논어>에는 공자의 출신에 대해 별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 이번 쉬는 시간에는 공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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