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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히어로들

공들여 만든 작품이 내 것이 아니게 된 어느 날의 회고

by 진심어린 로레인

한밤의 대화


"여보, 이 싸움을 계속할 수 있을까? 우리를 지키는 결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어!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개인은 기관을 상대한 소송에서 승산이 없어. 차라리 다른 기회를 만들어 보자"

"..."


곁에서 묵묵히 방법을 찾아주던 남편이 먼저 마침표를 찍자고 말했다. 듣고 싶지 않던 말이 스위치처럼 그간의 억울함을 눈물로 터뜨렸다. 지난 몇 주 사이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었다. 이 일에 정신이 팔리니, 아이들 챙기는 건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법률 상담과 문체부 저작권 위원회 문의, 관련 경험을 가진 여러 지인들의 조언을 들으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하루하루 한숨은 늘어갔고 슬픈 기색이 온몸을 뒤덮였다. 거실 구석에 맥없이 앉아 있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고사리 손으로 안아주는 아이들에게 미안함은 점점 커져갔다. 남편 말대로 이 모든 걸 끝낼 방법이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재발 방지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

본인은 OOO기관에서 주최한 「XXX 공모전」의 ‘제출물 활용 동의서’에 의거하여,
입상작의 저작재산권이 본 기관에 귀속되어 있음을 인지하였으며,
향후 입상작을 활용한(2차적 저작물포함) 일체의 수익사업을 진행하지 않음을 서약합니다.
만일 이를 위배할 경우, 손해배상 및 민·형사상 일체의 책임을 지는 것에 동의합니다.


문체부에서 2014년 발표한 창작물 공모전 가이드라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 공모전에 출품된 응모작의 저작권은 저작자인 응모자에게 원시적으로 귀속된다.

- 특히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부여받고자 하는 경우에는 저작권자와 별도로 협의해야 한다.

그러나 일개 창작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문구는 여전히 활자로만 존재했다. 기업이나 기관에서 수상작을 임의로 사용하려 했고 창작자는 맥없이 당하는 일이 공공연히 일어났다. 결국 나는 어제의 내가 애써 만든 작품을 이대로 내려놓아야 하는 건가?



창작의 서막


광고 기획자로 경력을 쌓아온 나는 일에 대한 만족감이 컸다. 기획자는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매일의 삶에서 겪은 불편함을 노트에 적으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해결 방법을 찾아갔다. 그러다 보면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거나 공감을 얻는 해결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이 일이 내가 가진 재주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위해 만든 동화


아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었다. 남편과 자주 가던 식당에 유모차가 들어가기 어려운 것도, 카페에 아이가 건드리면 위험한 물건이 많은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편하게 다닐 곳을 찾다 보면 그 종착지는 늘 바깥 한적한 공원이었다. 널따란 공원에서 아이들은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지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더 넓고 안전한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어느 날부터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었다. 그 이유는 바로 미세먼지. 당시 한반도를 덮친 미세먼지는 5살과 2살 난 아이들과 꼼짝없이 집콕 생활을 하게 했다. 외출을 위해 마스크를 해야 하는데, 아이는 그 불편함을 극구 거부했다. 아이와의 실랑이가 점점 힘들어지자, 고민이 깊어졌다.


어느 날 하나의 묘수가 떠올랐다. 열 마디 잔소리보다는 한 권의 동화책이면 어떨까? 아이들에게 동화책은 기본으로 배워야 할 내용을 즐겁게 학습하도록 도와주기에 적합한 매개체였다. 평소 좋아하는 영웅 콘셉트로 아이들의 기본 위생 습관을 도와주는 스토리의 동화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이를 위한 동화책 공모전을 보고 출품해 보기로 했다. 빠듯한 마감기한을 맞추기 위해 낮에는 육아, 밤에는 작업을 반복했다.



무심히 걷어 찬 돌멩이 효과


마감을 앞두고 필수 서류를 살펴보았다. 참가신청서, 출품작 개요서, 제출물 활용 동의서… 이게 뭐지? 개인정보 동의서의 내용처럼 저작권 관련한 여러 조항이 수두룩 적힌 페이지가 있었다. 저작권에 무지한 나는 그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제출물에 대한 권리 귀속
응모자가 공모전에 제출한 저작물(이하 ‘제출물’)에 대한 일체의 권리는 원칙적으로 응모자에게 있습니다. 단, 공모전 입상자는 제출물에 대한 저작재산권(2차적 저작물 작성권 및 편집저작물 작성권 포함)을 주최 측에게 허락(양도)합니다.


이 결정적인 문장을 놓쳐버린 것이다.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공인된 기관에서 그것도 어린이와 관련된 공공 기관이니 당연히 저작권을 가이드에 따랐겠지 생각하며 무심히 넘겼다. 그렇게 작품을 출품했고 잠시나마 후련함을 느꼈다. 부디 수상해서 이 동화책을 기관에서 잘 활용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운명은 예상치 못한 폭풍을 몰고 왔다.


공모전 결과 내 작품은 우수상이었다. 유선으로 수상 소식을 전하던 기관 담당자는 수상작 중 최우수 작품만 출간 및 배포된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했다. 작품이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된다는 아쉬움에 나는 용기를 내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주변에 알려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예를 들면, 자체 펀딩을 통해 어린이들 수업에 활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당시 감기에 목이 잠긴 담당자는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답변했다. 나는 그 말을 선뜻 믿어버렸다.


행동파인 나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위생습관을 가르치기 위한 교구로서 기능할 수 있게 주변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아 꾸준히 콘텐츠를 보완했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 원을 들여 일러스트 디자인과 스토리 수정 작업을 거쳤다. 드디어 최종 업그레이드된 동화책을 세상에 내놓을 자신감이 생겼고, 첫 펀딩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공들인 작품을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앞으로 갈길이 멀겠지만 발걸음은 무척 설레고 가벼웠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기관의 새로운 담당자라며 저작권 위반을 들먹이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동화책 관련 모든 작업을 중단하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주일 뒤, 기관 측 법무법인에서 네다섯명의 변호사들 도장이 찍은 내용증명이 도착했다. 두툼한 문서 안에는 그들의 입장이 법적인 용어로 담겨 있었다. 이미 저작물의 소유권이 기관으로 넘어간 창작물에 대해 부당 이득을 취한 불법행위라는 내용이 빼곡히 채워진 문서였다. 손이 얼마나 떨렸으면 그 내용을 다 읽기도 전에 종이를 떨어뜨렸다. 골리앗의 덩치에 제대로 기가 눌렸다. 그들은 개인 창작자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일주일 안에 서약서를 보내지 않으면 무조건 소송으로 가겠다고 압박해 왔다.


억울함에 문의했던 문체부의 저작권 담당자도 이 상황에 같이 울분을 토해주셨다. 기관에서 요구한 동의서는 문체부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2차적 저작물 작성권까지 부당하게 취득하기 위한 문서였다. 게다가 나는 수상 직후 담당자에게 명확히 사용 허락을 받았다. 그날 통화 내용을 녹음하지 못한 그때의 나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여전히 내 핸드폰 속에는 기존 담당자의 통화 내역과 연락처가 남아있지만, 그는 그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기관 속으로 숨어버렸다. 여기저기 자문을 구한 결과는, 동의서에 서명을 했고 관련 통화녹음파일이 없다면 되찾기 힘들다는 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안녕, 내 히어로들


식음을 전폐하는 괴로움에 몇 주도 안 돼서 살이 5kg나 빠졌다. 나와 가족들을 위해 그들과 대치하는 것은 더는 못할 짓이었다. 이렇게 히어로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건가? 창작자로서 불명예스러운 모욕까지 덤으로 얻은 상황에서 나는 일상의 나로 잘 돌아가기 위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가장 먼저 그들이 보낸 내용 증명서에 반박하는 최종 내용증명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기관의 부당한 저작권 탈취 과정을 명백히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발 방지 서약서에 서명하는 힘없는 개인 창작자이지만, 어제의 내가 수고하며 만들어 온 히어로들에 대해 제대로 매듭짓고 싶었다.


그렇게 저작권 영역에서 맨땅에 헤딩하며 헤매고서 제대로 배운 시간이었다. 실상은 성취보다는 상처에 가깝다. 그래서 이 경험이 앞으로 가는 동력이 되기보다는 주저앉히는 역할을 했다. 그 속에서도 내가 꼭 할 일이 있다면, 이런 차원의 아픔을 또 다른 누군가가 겪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행히 부당한 저작권 조항을 내세운 공모전을 발견했을 때 수정할 방법이 있다. 접수 기간 중에는 국민신문고 민원을 넣으면 창작자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내용으로 시정조치가 가능하다. 이듬해 그 기관에서는 내가 당했던 부당한 저작권 조항으로 새로운 공모전을 열었다. 나는 상처가 다시 들쑤셔지는 쓰라림을 참으며, 더 이상 억울한 창작자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실천에 옮겼다. 며칠 뒤, 그 조항은 정정된 것을 확인했다. 비로소 나는 나의 히어로들과 안녕을 고했다.




저작권, 어제의 내가 공들인 작품을 비춰주는 촛불


그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나는 지금도 계속 글을 쓰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창작자로서 주저앉고 싶었던 그 순간에서 나는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을까? 원망이라는 벽 앞에서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순간을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아주 연하게 일렁이는 빛 하나를 따라 걸어왔다. 그 빛은 내가 공들인 작품을 비추는 촛불의 일렁거림이었다. 그리고 곁에서 함께 촛불을 지켜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람의 결 사이에도 쉽사리 꺼지지 않게 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는 내가 계속 창작의 여정을 이어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여정을 완주할 수 있게, 내일의 내가 만들 작품에도 더 환한 빛을 비춰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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