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두 남매의 Bali 이야기, Green School 이야기 ⑧
오후 두 시쯤 되면 학교는 매일같이 탐방객들로 붐빈다. 하루에 수십 명씩 이곳을 견학하러 온다. 손님은 탐방객뿐만이 아니다. 각종 워크숍과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다. 학교의 초청으로 강연이나 공연을 위해 방문하거나, 환경 분야 등 여러 비영리단체와 사회적 기업에서 이슈를 공유하고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학교를 찾기도 한다.
안 그래도 아이들이 뛰어다녀서 정신이 없는데 학교는 늘 손님들로 북적인다. 조금 어수선하기도 하고, 학생들의 프라이버시나 보안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 번거로움은 학교가 끊임없이 세계와 교류하는 데 따르는 작은 대가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학생들이다. 교과서에 갇힌 교육이 아니라 살아있는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학교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서 홈페이지를 살펴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침팬지의 어머니 제인 구달Jane Goodall,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유명인사가 학교를 다녀갔다는 소식이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런 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 포스터가 붙기 시작했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lip Zimbardo 박사가 학교에 온다는 소식이다. 경영학을 전공한 나도 조직행동론 수업 시간에 짐바르도 교수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접했었다. 심리학은 물론 사회학, 경영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이 분의 이론을 적용하고 있지만, 과연 그린스쿨에서는 학생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전해질 지 궁금했다.
강연 날짜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학교에서 짐바르도 교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주로 점심 식사를 하는 피스 가든에서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메인 건물에서는 고등학교 아이들의 수업을 이끄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프라이머리Primary와 미들스쿨Middle School에서도 강의를 하고 토론을 이끌었다고 한다. 심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만나기 어려운 분에게서 직접 수업을 받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참 행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강의만 끝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머물면서 교육 과정에 깊이 참여하는 모습도 많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짐바르도 교수뿐 아니라 학교를 찾은 많은 인사들이 그런 시간을 가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의 재료가 되었고, 학생들의 관심과 지지는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그렇게 학교는 세계 곳곳의 현장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가고, 그것은 그대로 학교를 더욱 학교답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학교는 세상과 분리되지 않았고, 아이들의 꿈과도 동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은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진로를 탐색할 기회를 누리고 있었다.
메인 강의에 하루 앞서 학교는 특별 어셈블리를 마련하여 짐바르도 교수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평소처럼 프라이머리 과정 아이들부터 하이스쿨 학생들까지, 그리고 많은 학부모들도 참석했다. 첫 순서는 하이스쿨 학생들과 교수의 간단한 대담이었다. 패널로 나온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짐바르도 교수와 토의했던 내용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청중들과 공유했다. 질문하는 학생들도, 편안하고 친절하게 답변을 들려주는 교수도 아주 즐거워 보였다.
다음 순서로 선생님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선생님들은 현란한 댄스와 립싱크로 히어로 송 메들리Hero Songs Medley를 펼쳐 강당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이어진 미들스쿨 학생들의 "My hero is a river."라는 시 낭송은 감동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에서는 짐바도 교수와의 대담 외에 두 팀이 더 나와서,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과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를 주제로 재미있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히어로Hero''는 짐바르도 교수의 이론을 상징하는 키워드였을 뿐 아니라, 초등과정 아이들까지도 이번 어셈블리의 능동적인 청중으로 참여시키는 적절한 소재이기도 했다. 여든이 된 노교수는 이날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왔다. 아이들도 웃고 즐거워하며 할아버지 교수와의 시간을 보냈다.
짐바르도 교수는 내내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박수도 쳐 가며 그 시간을 무척 즐겼다.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고등학생까지, 선생님과 학부모가 모두 자리에서 '사회심리학'의 이론과 실재를 이렇게 즐겁게 배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런 계기가 아니면 언제 아이들에게 감옥 실험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이 분과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날 어셈블리는 '히어로'라는 주제를 굉장히 심도 있고, 재미있게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환경 문제뿐 아니라 지구촌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다뤄졌고,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평소의 어셈블리가 그랬듯이 짐바르도 교수와 함께 했던 이날의 특별한 어셈블리도 학생들이 주인공이었다. 수동적인 청중으로 강의를 듣고 질문하는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님으로 온 교수를 학습의 열매로 대접하며 풍성한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학교 다니던 시절, 중요한 손님을 맞이했을 때의 기억은 열심히 청소하던 것뿐이다. 회사에서도 의전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는다. 내용은 없고 형식뿐이다. 그린스쿨의 손님맞이는 달랐다.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학교에 며칠간 머물면서 학생들과 수업 시간을 함께 보냈고, 강연을 통해 학교의 교사들은 물론 학부모와 지역 사람들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짐바르도 교수와 마주하고 대화하면서 이 저명한 심리학자와 관계를 형성했을 것이고, 이분의 이론을 소재로 재미있는 춤과 노래, 토크쇼와 발표를 준비하면서 그 이론을 자연스럽게 소화했을 것이다. 수업은 추억이 되고, 강연은 축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