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쌍 May 20. 2022

혼자만 알고 싶었다

야생화 들판

  태양이 가장 뜨거운 정오에 집을 나섰다.  미룰 수 없는 도서관 반납일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무겁게 들고 간 책들을 도서반납에 넣고 나니 곧바로 집으로 가기 싫어졌다. 새로운 책을 골라 가볼까 싶었지만, 가벼워진 가방에 아무것도 넣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눈부시던 태양은 오전에 내렸던 소나기가 비구름이 춰버려 하늘이 흐릿했다. 목이 마른 듯 물가의 공기가 맡고 싶었다. 비가 그친 하늘은 어둑했지만 소나기가 내린 중랑천은 새 삶을 얻은 듯 생기가 돌았다.


 비가 그친 줄 알았는데 소나기가 나를 졸졸 따라오듯 작은 빗방울이 멈추지 않았다. 우산을 두고 나와서 오는 대로 비를 맞으며 키 작은 초록 풀밭이 깔린 들판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깨끗한 공기는 흐릿했던 내 눈도 잘 보이게 만들어 준건지, 아까는 보이지 않던 작고 섬세한 꽃들이 보였다.


나만 혼자 알고 싶은 야생화 들판

 색의 수레국화, 황색 캘리포니아 양귀비, 분홍 자주색 끈끈이대나물 꽃, 붉은 꽃양귀비, 흰색 안개초가 서로 뒤섞인 야생화가 핀 들판이었다. 나기가 몰고 다니는 회색 구름들 때문인지 자전거를 탄 사람도 걷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변을 둘러보니 들판에 나 홀로 있었다. 꿈을 꾼 듯 내 안에 잠재된 무엇이 꽃으로 드러난 듯 어지럽게 했다.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가족을 다시 데려온 듯 꽃밭은 느닷없이 나타나 나를 에워쌌다.


빗물로 촉촉하게 생기를 얻은 꽃들이 나만을 위해 와 준 것 같았지만 울적해 보였다.

 몇 해 전 중랑천 수레국화에게 푹 빠져 지낸 적이 있다. 갓 돌 지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곳에 가려고 애썼다. 아이와 단 둘이 가지 않으면 그 꽃은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홀로 갈 시간도 없었지만 다른 누군가와 가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홀로 글을 써야 하듯 고독을 불러오지 않으면 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수레국화를 보지 않으면 하루 일과가 더 고단하게 느껴져서 사진이라도 들여다보아야 했다. 유모차에 탄 아이도 그 작은 꽃을 좋아했다. 그리고 꽃보다 더 작은 점박이 무당벌레를 찾느라 아이는 '오오' 소리를 냈다. 그 리는 가슴 두드리며 정들이 울컥거리면 뱉어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의 나를 보라고 했다. 시 만난 야생화 들판은 예전에 만난 꽃밭처럼 보였지만, 이제 나는 똑같은 감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만발한 꽃들을 쫒느라 즐거울 줄 알았는데 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향기를 품은 꽃들은 변함없이 피어나는데 정작 나는 어디서도 희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너무도 개인적인 너무도 오래된 과거와 단절을 하고 싶었지만 깊고 깊은 비극은 바닥에 누른 얼룩처럼 마지막까지 남았다. 처음 태어난 날로 돌아갈 수 없듯 지난날의 기억을 없앨 가망은 전혀 없었다. 사랑하던 연인과 이별했다고 치부해버리고 싶었지만, 유년시절과의 단절은 애통함의 크기가 훨씬 무겁고 지독했다.

 꽃들과 풀밭 사이에 감도는 물기가 촉촉한 공기는 완벽했다. 금방 떠나지 못하고 그 풍경에서 머물며, 만날 수 없는 영혼을 느껴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가려진 울적하고 생기 넘치는 감동을 더 촘촘하게 단어로 옮기는 법을 배우고 싶다.


 아침 해가 비추자 다시 그곳으로 갈 궁리를 했다. 그곳엔 슬픔도 사랑도 무관심하게 만들어버리는 꽃들이 있다. 무수히 많은 점들로만 촘촘하게 그려진 그림처럼 초점을 잃은 채 한없이 바라보게 다. 이 풍기는 세밀한 풍경이 내 취향에 딱 았는지 이리저리 떠오르는 감정들도 낄 자리가 없다. 넋을 놓고 보는 내가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글을 쓰다가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어지럽게 할 때마다 꺼내 보려고 꽃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나 혼자였지만 곧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생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누구나 지나는 길 위에 그 꽃밭이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야생화 들판을 약속한 듯 다시 만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삶에 잠시 나타나 나를 일깨우며, 삶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려주려고 말이다.


 혼자만 알고 싶은 야생화 들판, 그곳은 나만 아는 감정들이 꽃처럼 피어난 나만 아는 곳이었다.








이전 07화 사진과 사라지는 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