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본다면 '같은 사람 맞아?'라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영 근거없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작년인가, 대학 동창에게 내가 쓴 책을 주면서, 논문 몇 개를 썼고 방송을 하고 있고... 근황을 전하자 이렇게 말한 걸 보면 말이다.
어머, 너 대학교 때는 이렇게 욕심이 많지 않았잖아?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인생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라 믿는다. 친구를 만나지 않은 시간 동안 내 인생을 크게 바꾼 몇 번의 사건이 바꿔놓은 나라는 사람.
사건 하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남편을 만난 일.
사건 둘. 30대 후반에 아이를 낳은 사건
사건 셋. 서른 아홉에 엄마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소풍을 떠난 사건...
이렇게 앙코르 커리어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된 건 세번째 사건이 나를 파도처럼 둥둥 밀어냈기 때문이다. 평화로워야했던 토요일 오후, 그날따라 오전이 아닌 오후에 전화한 엄마는 응급실에 계셨고... 월요일에 입원해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말씀하셨던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났다. 아직도 믿을 수 없어서 가끔 지하철에서 엄마를 닮은 분이 지나가면 돌아보게 될 정도이지만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 되고 말았다.
엄마,
우리 애 봐주느라 너무 피곤했나봐...
목놓아 우는 내게 아빠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는 손주 좋아서 본거야. 너 때문 아니다.
한 때는 한 몸이었던 엄마를 잃은 사건. 깊이 사랑하는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죽음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마주하게 된 사건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 대화를 나누며 육신을 갖고 있던 존재가 이 세상에서 감쪽 같이 사라진다니. 하늘나라에 가 편안히 계실 것이라는 믿음조차 흔들렸고, 3년이 지나서야 겨우 엄마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에서 남편에게 나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대학원에 가야겠어.
하고 싶은 건 해 보고 죽어야지.
만약 교수가 되면 65세까지 월급을 받을 수도 있고.
남편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미를 잃은 아내에게 모진 말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등록금을 하라며 적금까지 주며 지지해줬다.
사실 내가 박사과정에 진학하겠다는 선언은 갑작스럽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당시 나는 아이가 두 살이라 워킹맘 초보였다. 출산 후유증으로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악착같이 일을 하느라 체력이 고갈난 상태였다. 부부가 모두 일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직업을 가져 일요일마다 아이를 엄마 아빠께 맡기고, 평일에는 새벽부터 집에 고모가 매일 오셨다. 친한 친구를 만나면 늘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 원" 하고 푸념을 하기 일쑤였다.
사실 난 학부와 석사를 마친 뒤 일을 한 터라 '언젠가는 박사도...'라는 꿈을 아주 작게 접고 접어 마음 구석에 숨겨두고 있었다. 회사 일이 힘들 때면 친구 앞에서 그 마음을 드러냈고, 친구는 전공을 바꿔 대학원을 나와 커리어 전환에 성공을 한 터라 나에게 공부를 할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 '먹고사니즘'을 걱정하는 내게, 학교에서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또 있고, 하나님께서 먹을 건 알아서 채워주신다고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바쁜 나를 보며 엄마도 가끔 "대학원에 가서 공부해. 공부는 그래도 하고 나면 좀 시간 여유도 생길 거야"라고 말씀하셨지만, 난 "어휴 내가 돈이 어디 있어!"라며 신경질이나 부려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난 그 마음 속에 구겨뒀던 꿈을 꺼내어 남편 앞에서 흔들었던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갑자기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하고 싶은 일은 하다 죽어야하지 않을까?'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해, 예기치않게 회사에서는 부장으로 승진을 했다. 그런 나를 아끼는 선배 언니는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게 해 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아빠까지도 "일 잘 하고 있는데 회사를 계속 다니면 어떠냐"며 "공부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고 만류하셨다. 심지어 어떤 교수님은 내 후배가 이미 교수로 왔다고, 나이가 많다고 말리셨다.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내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난 적극적으로 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반대하지 않는 남편을 믿고, 대학원에 결국 진학을 했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학비 외 생활비가 필요하니 회사 생활을 병행했다.
나이도 많았고, 아이도 어렸고, 공부할 수 있게 비용을 따로 마련해둔 것도 아니고, 이미 회사 생활을 오래 해 공부를 좋아하거나 잘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스무살이나 서른살처럼, 아니, 그 때는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한 결정을 마흔살에 갑자기 했던 건... 어쩌면 엄마를 갑자기 잃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고, "제 정신 아닌 상태에서 찾아온 '신내림' 같은 결정"이라고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한다.
덕분에 지난 10년은 그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사업을 할 스타일이 아니라 공부를 하겠다고 말하고 다닌 게 무색하게, 결국은 여러 일을 하며 독립적 지식노동자로 앙코르 커리어를 살아가고 있다. 앙코르 커리어를 만드는 과정은 빼를 깎는 고통이 동반되는 게 사실이다. 아마도 엄마가 계셨다면, 엄마 뒤에 숨어 응석이나 부렸지,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떠나면서도, 내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선물을 남기고 떠나신 셈이다.